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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자료] 페르 알빈 한손의 정치노선과 리더십 - 신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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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연구> 제12호 (2011년 8월)에 게재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의 정치노선과 리더십

 

신정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와 페르 알빈 한손

 

정치에서 지도자의 리더십은 어디에서나 중요하다. 정당정치가 잘 발달되어 있어 정치의 예측가능성이 높은 스웨덴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로 약칭) 운동의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 된 시기가 1930년대였다. 1930년대는 경제적으로는 세계 대공황기였고 국제정치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였다. 국내정치적으로나 국제정치적으로나 매우 어려웠던 이 시기에 스웨덴 사민당은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사민당은 1932년에 집권하여 1933년부터 세계 최초로 케인스주의적 수요부양정책을 집행하여 공황 극복에 기여하였으며 2차대전 기간에는 사민당 주도로 거국내각을 구성하여 줄타기 외교를 통해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또 1933년에 사민당은 부르주아 정당의 하나인 농민당과 정책연합을 이루어 공황 극복에 성공하였고 1936년부터는 농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장기집권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이러한 안정적 정치기반에 힘입어 193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사회복지정책을 실시하여 2차대전 이후 스웨덴이 대표적 복지국가로 발전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30년대의 스웨덴 사민당에 대한 국내외 연구는 무엇보다도 케인스주의적 수요부양정책에 집중되어 있다. 사민당 지도자 차원에서는 이러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재무부 장관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에 초점이 맞추어져왔다. 복지국가 문제에 초점을 둔 연구들에서는 1930년대에 전개된 인구문제 논쟁에서 사민당의 가족정책의 기본 틀을 형성한 뮈르달 부부(Gunnar & Alva Myrdal)와 당시 사회부 장관으로서 사회복지정책의 발전을 총괄한 묄러(Möller)의 역할이 주목받아왔다.

반면에 이 시기에 사민당 당수이자(1928-46) 정부 수상으로서(1932-46) 사민당과 정부를 이끌어간 최고지도자였던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왔다. 그저 그의 1928년 의회 연설 ‘인민의 가정, 국민의 가정’을 통해 향후 사민당의 정책노선을 대표해주는 용어인 ‘인민의 가정’(folkhemmet; the people's home)이란 용어를 정착시킨 인물 정도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사민당 헤게모니 시대가 개막되는 과정에서 한손이 수행한 역할은 막중했다. 그는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 사민당이 입안하고 집행한 정책들을 총괄 지휘했을 뿐 아니라, 1920년대 말에 전통적인 ‘계급정치’(class politics) 노선에 대비되는 ‘국민정치’(mass politics) 노선을 주창하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도록 당 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을 주도하였다. 한손은 뛰어난 정치감각과 리더십으로 오랜 기간 이념적 혼란과 정치적 무능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민당을 유능한 집권정당으로 변모시켰으며 서민적 풍모와 포용력 있는 리더십으로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손은 사민당 지도자라기보다는 정당을 초월하여 국부(國父)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스웨덴 현대 정치사에서 최고의 지도자로 손꼽혀왔다.

이 논문은 1930년대 이후 스웨덴 사민당이 확고한 정치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게 되는 데 한손이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하였으며 그의 정치노선과 정치적 리더십의 특징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 2장에서는 한손이 초기 사민당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하고 사민당을 수권능력을 갖춘 강력한 정당으로 발전시켜 간 과정을 서술할 것이다. 3장에서는 1930년대의 경제공황 극복과정에서 한손이 수행한 역할을 서술할 것이다. 4장에서는 2차대전의 위기 속에서 한손이 중립노선을 견지하며 스웨덴을 전쟁의 참화 위기로부터 건져낸 과정을 설명할 것이다. 5장에서는 한손의 말년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고 6장에서는 앞에서의 설명들에 기초하여 한손의 정치노선과 리더십 스타일의 주요 특징들을 정리할 것이다.

 

2. 권력으로 가는 길: 사민당의 정치노선 및 조직체계 재정비

 

한손은 1885년에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후에 바로 직업세계로 뛰어들었다. 사환, 상점 점원 등 최하층 노동자로 일하다가 10대 말에 사민주의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20대에는 주로 사민당 청년조직인 ‘청년동맹’에서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사민당 기관지의 편집업무에 종사하였다. 청년 시절에 한손은 이념적으로 카우츠키적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서 있었는데 이는 당시 사민당 주류의 이념적 입장이기도 했다.

1889년에 창당된 사민당은 이념적으로 마르크주의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라살레주의, 혁명적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이념 노선을 포용하고 있었다. 당시 사민당의 주류이념이었던 카우츠키적 마르크스주의란 독일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카우츠키(Karl Kautsky)의 정치적 입장을 말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주의로 이행해가는 것을 필연적 법칙이라 보면서도 실제 정치에서는 선거를 통해 집권당이 되어 가능한 한 평화적 방식으로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해가는 데 주력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스웨덴은 독일에 비해 자본주의 발전이 뒤져 있었기 때문에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해간다는 과제는 비교적 먼 미래의 일로 간주되었으며 완전한 보통선거권의 쟁취를 통해 집권당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유럽의 여타 사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사민당도 이념과 정치노선에서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은 많은 숙제를 안고 있었다. 예컨대 집권당이 되어 개혁을 계속해가다보면 언젠가 사회주의 사회로 순탄하게 이행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과제인 생산수단 소유의 사회화와 관련하여 혁명적 국면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또 부르주아 정당들 중 개혁적 성향을 가진 자유당과의 정책협력 또는 연립정부 구성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이념의 독자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단독으로 집권하기 전에는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해서도 당 내에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다. 또 마르크스주의 외에도 혁명적 무정부주의 등 이질적 이념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회화문제 못지않게 당 내에서 주요한 쟁점이 되었던 주제가 국방문제였다. 사민당은 창당 이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군사주의에 반대하고 평화주의와 군축을 주장했다. 그러나 군축의 방식과 정도와 관련해선 당내 세력 간에 상당한 온도차가 있었다. 대체로 급진적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급진파일수록 군축문제에서도 급진적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다른 나라들의 군축상황과 무관하게 스웨덴이 일방적이고 일관되게 군축을 추진해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 중에는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를 주장하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들도 있었고, 스웨덴처럼 작은 나라에선 군대를 유지해보았자 주변 강대국이 침입할 경우 어차피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으므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국방 허무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사민당 지도부는 점진적 군축은 지지하였지만 주변국의 사정과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군축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과는 거리를 두었다. 급진파들은 주로 청년동맹에 집결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사민당 지도부와 사사건건 충돌하다가 결국 1917년 5월에 ‘스웨덴 사민주의 좌익당’(이하 ‘좌익당’으로 약칭)을 결성하여 사민당으로부터 독립해나갔다.

한손은 10대 말에 사민주의 청년운동에 투신한 지 얼마 안 되어 유망한 청년 지도자로 부상하였는데 1910년대에 한손은 청년동맹의 지도자의 하나이자 사민주의 저널리스트로서 주로 청년동맹에 포진되어 있던 급진파에 맞서 일관되게 당 지도부의 개혁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사민당은 1920년대에 소수파 집권당으로서 세 차례 단기 집권하였다. 사민당 창당 주역이자 당수였던 브란팅(Hjalmar Branting)의 총애를 받던 한손은 브란팅이 수상직을 맡아 구성했던 세 차례의 사민당 내각에서 모두 국방부 장관으로 일했다. 국방부 장관 재직 기간에 한손은 군비를 축소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여유예산을 사회복지지출을 늘리는 데 사용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손은 국방부 장관으로서 일하면서 일방적 군축안과 같은 급진파의 요구가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후 국방문제에서 현실주의적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1925년에 브란팅이 사망하자 한손은 임시 당의장직을 맡게 되었고 1927년에는 사민당 원내총무로도 선출되었다. 그리고 1928년에는 사민당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당 내에서 한손의 입지가 그리 확고하지 않았다. 한손보다 사민주의 운동 경험이 풍부한 고참 선배들도 있었고 온건파-급진파 간의 이념적 갈등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특히 1917년에 좌익당을 창당하여 사민당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급진파의 상당수가 이후 사민당으로 속속 재입당하게 됨에 따라 온건파-급진파 간의 오랜 갈등이 재연되었다. 좌익당은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이 조직되자 코민테른의 노선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였으며 당명을 ‘스웨덴 공산당’(이하 ‘공산당’으로 약칭)으로 바꾸었는데, 코민테른 노선을 추종하지 않던 당원들은 대부분 사민당으로 돌아왔다. 좌익당 창당을 주도했던 회그룬드(Zeth Höglund)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비록 사민당에 다시 들어왔지만 이념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공산당과 가까워서 재입당 이후 국방문제 등과 관련하여 당 지도부와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에만 해도 사민당은 이념노선이 서로 다른 분파들의 활동을 관대하게 허용하는 편이었다.

한손은 회그룬드 등 급진파가 재입당한 후에도 이들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않았는데, 이들의 노선과 분명하게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로 작용한 것이 1928년 총선이었다. 1928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상속세 강화 등 비교적 급진적 공약을 들고 선거에 임했으며 공산당과도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공통기반에 기초하여 선거에서 협력하였다. 1928년 선거는 사민당의 대패로 끝났다. 1924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득표율이 41.1%였는데 1928년 총선에서는 37%에 그쳤다(Sch?llerqvist 1992: 82). 선거운동과정에서 부르주아 정당들은 사민당과 공산당을 싸잡아 한 통속으로 몰아붙이는 선거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부르주아 정당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우익당은 선정적인 선거 포스터들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서 사민당과 공산당은 러시아의 코작 기병대로 묘사되어 스웨덴 시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가정을 파괴하며 여성과 아동을 억압하는 폭력세력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선거결과를 분석해보니 여성, 농업노동자, 소농, 중하위 사무직 노동자 집단에서 사민당 지지가 미약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Ohlsson, Lars & Lars Ekdahl 2002: 62).

한손은 이 선거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민당의 정치노선과 조직을 전반적으로 크게 재정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우선 공산당과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를 느꼈으며 많은 사안에서 공산당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당내 급진파 세력을 강하게 견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세력을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당내 분파활동도 규제하여 당내 급진파가 당의 공식입장과 다른 견해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을 억제시키려 했다. 또한 사민당의 핵심 조직기반인 L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노력했다. 당시 LO는 사민주의자들이 주도하였으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은 상태여서 LO 지도부는 가능한 한 사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이념논쟁에 개입하지 않고 통상적인 노동조합 활동에 전념하려 했다. 한손은 LO 지도부에게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고, 공산주의자들이 LO 내에 공산당 세포조직을 적극적으로 운영해왔듯이 사민주의자들도 LO 내에서 사민주의자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조직활동을 전개할 것을 장려하였다(Ibid., pp. 86-88).

또한 산업노동자의 지지만으로는 다수당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하여 소농, 사무직 노동자 등 중간계층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가기를 도모하였다. 그러기 위해 ‘계급투쟁’과 같은 사민당의 전통적인 용어를 쓰는 것을 자제하고 ‘국민’ 또는 ‘인민’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면서, 사민당이 노동자계급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정당’이 아니라 온 국민 또는 전체 인민, 특히 서민대중의 이익을 폭넓게 대변하는 ‘국민정당’으로 대중에게 인식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사실 한손은 1928년 선거 이전에도 이러한 ‘국민정당 노선’을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일관된 ‘계급정당 노선’을 주장하는 급진파의 영향력도 상당히 강했던 관계로 이런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고 일관되게 표명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1928년 선거가 이루어지기 전인 1928년 1월에 한손이 의회에서 한 유명한 연설인 ‘인민의 가정, 국민의 가정’은 이러한 국민정당 노선 지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널리 인용되어온 이 연설의 핵심 대목은 다음과 같다.

 

가정의 기초는 공동체성과 공동의 감정이다. 좋은 가정에서는 그 누구도 특권을 인정받지 않으며 소외되지도 않는다. 또 편애 받는 사람도 없고 따돌림 받는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희생에 기초하여 이득을 보고자 하지 않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거나 수탈하지 않는다. 좋은 가정에서는 평등, 배려, 협력, 도움주기가 지배한다. 커다란 인민의 그리고 국민의 가정에 적용한다면 이는 현재 국민을 특권층과 소외층, 지배자와 신민(臣民), 수탈자와 피수탈자로 나누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장벽의 철폐를 의미한다.

 

노동자계급 대신에 인민과 국민을 강조하고 사회를 가정에 비유한 이 연설을 통해, 한손은 계급투쟁보다는 계급협력과 사회통합을 강조하고 사민당을 소외받는 모든 서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시에 스웨덴 사회 구성원 전체의 공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인식시키기를 도모했던 것이다.

또한 한손은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는 한편 1920년대 내내 스웨덴 사회의 핵심문제였던 노동쟁의 문제에서도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공산당과의 분명한 단절과 대결, 당내 급진파의 영향력 견제와 당의 규율 강화, 부르주아 세력과의 협력 가능성 모색 등을 핵심 내용으로 삼는 한손의 새로운 노선은 초기에는 상당한 저항에 부딪쳤으나 점차 사민당의 주류입장으로 정착되어 갔다.

사민당의 새로운 정치노선과 한손의 리더십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계기로 작용한 것이 1931년에 발생한 ‘오달렌(Ådalen) 사건’이었다. 스웨덴 북부 지방인 노를란드(Norrland)의 목재산업 콘체른인 그라닝에베르켄(Graningeverken)이 경기침체를 명분으로 임금을 삭감하자 핼싱란드(Hälsingland) 지역에 소재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개시하였고 오달렌 지역의 노동자들도 동조파업을 일으켰다. 고용주는 이에 대체인력(‘파업파괴자’라 불린다) 투입으로 맞섰다. 1931년 5월 13일에 오달렌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대규모 시위가 조직되었고 시위대는 파업파괴자들이 일하던 현장으로 행진하여 파업파괴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지방정부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였고 결국 시위대와 군대의 충돌과정에서 군대가 발포하여 시위노동자 네 명과 구경하던 여성 한 명이 사망했다.

오달렌 사건은 단기적으로는 공산당과 사민당 내 급진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망자들에 대한 애도의 물결과 자본가, 군대, 자유당 정부에 대한 비난의 함성이 들끓었다. 특히 사민당 내 급진파는 이 사건을 통해 군부의 권위주의적 속성과 폭력성이 여실히 드러났으므로 급진파가 늘 주장해오던 일방적이고 과감한 군축정책의 정당성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한손은 자본가와 군대, 자유당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무리하게 시위를 조직하고 지도한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오달렌 사건에 대한 해석과 사후조치를 둘러싼 갈등은 사민당이 다시 한 번 분당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손을 필두로 하는 지도부와 회그룬드, 엥베리(Arthur Engberg)를 대표로 하는 급진파 간의 협상 끝에 타협안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볼 때 당 지도부의 권위를 강화하고 당내 결속을 강화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Sch?llerqvist 1922: 142-165). 한손은 오달렌 사건 등을 거치면서 당내 급진파로부터 대표적인 우파 사민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로 지목되어 비판의 표적이 되었지만 당에 대한 한손의 장악력은 한결 더 강화되었다.

또 이 시기에 LO 지도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는데 신임 지도부는 한손의 노선에 동조하며 LO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힘쓰며 사민당과의 결속을 강화해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차 한손의 국민정당 노선이 당에 강하게 뿌리내리게 되었고 당내의 분파활동이 억제되고 당의 규율이 강화되면서 당 지도부의 입장이 하부조직에까지 강하게 관철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L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변화하고 LO와 사민당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사민당은 제대로 집권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강력한 정당으로 변모해갔다.

 

3. 복지국가로 가는 길: 공황극복정책의 시행과 복지국가의 기반 조성

 

1932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승리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스웨덴에도 강하게 밀려오던 시기였다. 선거 몇 달 전인 1932년 5월에 사민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생산수단 소유의 사회화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당내 급진파는 세계 대공황이 닥친 지금이야말로 생산수단 소유의 사회화를 위한 구체적 조치가 마련되어야 할 시기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한손 등 당 지도부는 제한적 위기관리정책을 통해 일단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특히 당내 최고 이론가이자 당 지도부 내에서는 좌파적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의 하나였던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는 사회화와 계획경제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사회화 없이도 부분적인 계획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염두에 둔 계획경제란 케인스주의적 수요부양정책을 의미했다.

비그포르스는 본래 언어학자였지만 독학을 통해 풍부한 경제지식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르크tm주의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주의 이념 조류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주류경제학 이론들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그는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초기 저작들과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케인스주의적 수요부양정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또 사민주의 계열의 젊은 경제학자인 뮈르달(Gunnar Myrdal)과 자유주의 계열의 경제학자인 올린(Bertil Ohlin)이 대표하는 스톡홀름 학파로부터 케인스주의적 수요부양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또 그는 당 지도부 내에서는 대표적인 좌파 사민주의자였던 관계로 당내 급진파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전당대회에서 결국 당 지도부의 입장이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었다(신정완 2000: 72-79). 한손은 경제학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으나 사민주의 정치인으로서의 본능적 감각 때문인지 비그포르스의 구상의 핵심을 쉽게 이해하고 이를 앞장서 일관되게 지지하였다고 한다(Fredriksson, Gunnar, Dieter Strand, Bo S?dersten 1970: 112).

집권 직후인 1933년부터 본격적인 공황극복정책을 집행하였는데 그 핵심은 적극적인 실업대책과 농업 및 빈농에 대한 보호?지원정책이었다.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공공근로사업의 성격을 바꾸어 공공근로 참여자들에게도 시장임금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였으며 실업대책 예산을 대폭 늘려 실업대책 수혜자 규모를 크게 증대시켰다. 또 1934년에는 실업보험제도를 도입하였다. 한편 사민당은 그동안 일관되게 자유무역정책을 지지해왔는데 이제 농업에 한하여 자유무역정책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농산물 수입규제를 통해 국내 농산물 가격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도록 하고 공황으로 타격받은 빈곤한 농민에 대한 금융지원정책을 실시하였다.

농업과 농민에 대한 지원정책이 도입된 것은 농민의 경제적 사정이 악화된 데 기인하기도 했지만 농민당과의 정책협력을 위한 정치적 고려의 산물이기도 했다. 적극적 실업대책으로 대표되는 케인스주의적 수요부양정책을 집행하려면 최소한 부르주아 정당들 중 하나의 정당의 지지는 받아야 했는데 이러한 정책협력의 파트너로 농민당을 선택한 것이다. 또 사민당 지도부는 농민당 지지층의 상당수가 경제위기를 계기로 파시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을 우려하였는데, 농민당을 정책협력 파트너로 삼으면 농민당 지지층 일각의 파시즘 동조 성향을 차단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기도 했다(Ohlsson, Lars & Lars Ekdahl 2002: 80). 농민당과의 협상에는 재무부장관 비그포르스와 수상 한손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공황극복정책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집행되어 공황 극복에 일조하였고 사민당은 이를 통해 유능한 집권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처음으로 보일 수 있었다. 1936년에는 아예 농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안정적 집권 기반을 마련하였다. 사민당 장기 집권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 다양한 사회복지제도를 새로 도입하거나 기존의 제도를 강화하였다. 1934년에는 실업보험제도가 도입되었고 1935년에는 국민연금 지급액이 상향 조정되었으며 1937년에는 출산수당제도와 주택대출지원제도가 도입되었고 1938년에는 2주 유급휴가제도가 도입되었다. 스웨덴 사회가 현대적 복지국가로 발전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사관계 영역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스웨덴은 대규모 노동쟁의가 자주 발생하는 대표적 나라의 하나였는데 사민당이 1932년에 집권한 직후인 1933년에도 건설부문에서 장기파업이 진행되었다. 사민당은 도로, 병원 등의 건설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고용을 창출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건설부문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이러한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입법조치를 통해 해묵은 노동쟁의문제를 해결하라고 사민당 정부에 압박을 가해왔다. 사민당 지도부는 LO와 전국 수준의 사용자단체인 SAF에게 입법조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LO와 SAF는 모두 노동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며 자율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취했고 사민당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LO와 SAF는 여러 해에 걸친 협상 끝에 1938년에 스톡홀름 근교의 휴양지 살트쉐바덴(Saltsjöbaden)에서 노동쟁의 해결방식에 관한 협약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살트쉐바덴협약’이다. 노동쟁의 해결절차를 제도화하여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분쟁사항이 해결될 수 있도록 만든 이 협약이 타결된 이후 노동쟁의가 극적으로 감소하여 스웨덴은 노동쟁의 발생률이 가장 낮은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전국 수준의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가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스웨덴식 노사관계’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또 한손과 비그포르스 등 사민당 수뇌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자본가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라 판단하여 사민당 정부 집권에 대한 자본가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자본가들이 생산과 투자에 전념하여 고용을 많이 창출하는 것이 사민당 정부가 기대하는 것이라고 하며 자본가들의 경제활동을 장려하였고 불필요하게 자본가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한손이 1920년대에서부터 구상한 국민정당 노선이 결실을 맺어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어가면서 한손이 1928년 의회 연설에서 이야기한 ‘인민의 가정’은 사민당의 점진적 개혁주의, 복지국가주의, 자본가계급과의 협력노선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되어갔다.

4. 평화로 가는 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노선 견지

 

1939년에 2차대전이 발발하자 스웨덴도 전쟁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한손은 전쟁의 위협에 대비하려면 정당 간의 협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판단하여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내각에 참여시켜 거국내각을 구성하였다. 물론 한손이 수상직을 계속 맡았다. 독일과 소련 사이에 불가침 협정이 체결된 후에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했다. 핀란드는 1809-1917년 기간에 소련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는데 그 전에는 600년간 스웨덴의 식민지였다. 따라서 핀란드에는 스웨덴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었고 스웨덴은 핀란드를 가장 가까운 우방국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었다.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군부, 외무부 등을 중심으로 스웨덴이 핀란드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었다. 소련이 핀란드를 군사적으로 지배하게 되면 다음에는 스웨덴이 소련의 공격대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강했고 스웨덴 국민은 대부분 소련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스웨덴이 핀란드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집단은 크게 보면 두 부류였다. 하나는 군부와 외교부 등에 포진한 보수적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반소련 정서, 우방국인 핀란드에 대한 의리, 그리고 과거에 핀란드를 오래 지배했던 스웨덴의 국가적 자존심 등을 이유로 핀란드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북구 나라들 사이의 협력정신을 중시하는 입장과 이웃 약소국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로 개입을 주장하는 집단이었다. 1932-39년 기간에 외무부 장관직을 맡았던 사민당 원로 산들레르(Rickard Sandler)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손은 불개입노선을 확고하게 견지했고 결국 산들레르는 외무부 장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한손이 보기에 핀란드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결국 소련과의 본격적 전쟁에 휩싸여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은 핀란드 전쟁에서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핀란드에 군수물자와 필수품을 지원했으며 스웨덴 국민이 자원병을 조직하여 핀란드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핀란드 전쟁에 대한 한손의 불개입정책은 군부 지도자들의 분노를 샀고 일부 군부 수뇌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한손을 실각시키고 다른 인물을 수상직에 앉히려는 모의까지 했다고 한다(Fredriksson, Gunnar, Dieter Strand, Bo S?dersten 1970: 69-70). 또한 한손이 국제정치와 외교문제에 관해 식견이 부족한 인물이라는 점도 군부와 외교부 등에 포진한 보수적 엘리트들이 한손에 대해 불만과 불안감을 품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핀란드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종결된 이후 새로 불거진 더 심각한 문제는 독일로부터의 압박이었다. 나치 독일은 스웨덴의 이웃나라인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군사적 지배를 달성하였으며 2차대전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대륙 전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나치 독일은 스웨덴 정부에게 노르웨이와 독일 사이에 휴가 병력과 군수물자의 이동을 위해 스웨덴 철도를 정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스웨덴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고 국제정치적으로 모욕적이며 윤리적으로도 곤란한 요구였으나 한손이 이끄는 거국내각은 이를 수용했다. 거부할 경우 독일의 침공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독일에 군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41년 6월에는 독일은 스웨덴에게 노르웨이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 중무장 보병사단을 핀란드로 이동시키기 위해 이 사단이 스웨덴 영토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이는 과거의 휴가 병력 이동을 위한 스웨덴 철도 이용 요구보다도 더 강한 요구였으나 스웨덴 정부는 이것도 수용했다. 또 1940년 12월에 스웨덴과 독일 사이에 무역협정이 체결되었는데 그 골자는 스웨덴의 철강을 독일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이 철강은 주로 독일 군수산업의 원자재로 사용되었다. 결국 스웨덴은 독일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준 것이다.

1943년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패배하자 스웨덴 정부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천하무적으로 보였던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 등 연합국들이 노르웨이와 독일 사이의 휴가 병력 이동열차 운행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하자 스웨덴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독일에 대한 철강 수출 규모도 급격히 줄였다. 독일과 점점 더 거리를 두고 연합국의 요구를 점점 더 많이 수용하는 방향으로 외교정책노선을 전환한 것이다. 따라서 스웨덴의 중립노선은 문자 그대로 어느 쪽 입장도 편들지 않는 철저한 중립이 아니라 전쟁 상황에 따라 강한 쪽의 요구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 형태의 중립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손이 이끈 거국내각이 일관되게 고수한 중립노선,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전쟁불참노선에 대해 사민당 내부에서도 불만이 없지 않았다. 특히 독일에게 너무 양보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한손은 스웨덴 정부와 사민당이 도덕적 상처를 입는다 하더라도 스웨덴 국민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지켜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했고 이는 대다수 스웨덴 국민의 희망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2차대전기에 한손은 잦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웨덴 국민을 위로하고 배급정책 등 정부의 전시정책에 협조해주기를 당부했는데, 한손은 설탕, 커피의 배급 등 국민의 일상생활과 직결된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국민을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대중적 언어로 소탈하게 이야기하는 한손의 라디오 연설은 한손과 거국내각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점차 한손은 정파를 넘어 대다수 국민에게 전쟁위기로부터 스웨덴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국부’로서 인식되어갔다. 1943년에 일반 국민을 상대로 시행된 여론조사에서 “만일 한손이 수상직에서 사퇴한다면 누가 그 후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설문에 대해 응답자의 83%가 한손 외에는 다른 사람을 전혀 떠올릴 수 없다고 응답했다고 한다(Ibid., p. 86).

 

5. 말년의 한손

 

전쟁이 끝나갈 때가 되자 전쟁 종결 이후에 사민당이 스웨덴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사민당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일단 사민당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1945년 총선 이후엔 거국내각을 해산시키고 사민당 단독 정부를 구성하자는 입장이 대세였다. 이에 대해 한손은 반대하였다. 거국내각은 매우 성공적으로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에 전쟁 종결 이후에도 굳이 해산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1944년에 사민당과 LO는 전쟁 종결 이후 스웨덴 경제의 운영방향 구상인 『노동운동의 전후(戰後)강령』을 공동으로 작성하였는데 이 강령은 비그포르스와 뮈르달이 주도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 강령은 상당히 급진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금융시장에 대한 공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보험회사들을 국유화하고 국영 상업은행을 신설할 것을 제안했다. 또 산업부문에서도 시장구조가 독과점적이거나 시장경쟁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민간기업을 국유화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석유유통업의 국유화가 제안되었다. 또한 국가 주도로 산업합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한손은 이 강령에 반대했다. 내용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사민당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키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손의 입장은 이제 사민당 지도부 내에서도 지나치게 보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한손은 점차 당 지도부 내에서 고립되어갔다(Ibid., p. 56). 한손은 이 강령에 반대하였으나 일단 이 강령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자 사민당 최고 지도자로서 대외적으로 앞장서 이 강령을 옹호했다. 1945년 총선 이후엔 사민당 단독 정부가 구성되었고 한손은 계속 수상직을 유지했다.

한손은 전쟁이 끝난 지 1년 남짓한 시기인 1946년 10월 6일에 사망했다. 이 날은 노르웨이 정부 대표단이 스웨덴을 방문한 날이었다. 한손은 2차대전 기간에 노르웨이와 독일 사이에 휴가 병력 열차를 운영한 것 등과 관련하여 노르웨이 국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 날 노르웨이 정부 대표단과의 회동은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손은 마음의 짐을 상당히 덜 수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밤늦게 모든 일정이 끝나자 회동에 참석했던 뮈르달이 한손에게 함께 택시를 타고 귀가하자고 권했다. 한손은 평소에 늘 수행원 없이 전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이 날은 너무 시간이 늦었으니 택시를 함께 타자고 권한 것이다. 그러자 한손은 오늘같이 기분 좋은 날은 서둘러 귀가하고 싶지 않다며 뮈르달을 먼저 보내고 혼자 전차를 탔다. 그리고 전차에서 내려 기차로 환승하기 위해 걸어가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Myrdal 1982: 214-216). 한 나라의 수상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쓸쓸한 죽음이었지만 한 사민당 당원은 한손의 사망소식을 듣고 “노동자 정당 지도자로서는 가장 어울리는 죽음을 맞았다”고 평했다고 한다.

 

6. 한손의 정치노선과 리더십 스타일

 

지금까지 살펴본 한손의 정치노선에서 발견되는 핵심적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계급정치(class politics) 노선에 대비되는 국민정치(mass politics) 노선을 들 수 있다. 계급정치 노선이란 사민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며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노선이다. 반면에 국민정치 노선은 노동자뿐 아니라 광범위한 서민대중의 이익을 폭넓게 대변하는 한편 국민 전체의 공통의 이익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구현하려는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손은 일찍이 사민당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계급정당이라기보다는 국민정당으로 발전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민정치 노선이 반드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경시하거나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대립을 무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정치의 틀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인민의 가정, 국민의 가정’ 연설에는 좋은 가정에 비유할 수 있는 좋은 사회에서는 “현재 국민을 지배자와 신민, 수탈자와 피수탈자로 나누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장벽의 철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구가 있다. 즉 사회의 여러 계급 및 집단 사이의 협력을 통해 사회를 좋은 가정과 같이 발전시켜갈 수 있지만, 이는 사회적, 경제적 장벽을 철폐하여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사회경제적 약자층의 처지를 개선시켜갈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평등주의적 개혁을 통해서만 진정한 ‘인민의 가정, 국민의 가정’이 형성될 수 있고 사회통합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은 1930년대 이후 국민정치의 형식 속에서 사회복지제도의 확충 등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서민대중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구현해갔다.

한손이 대표한 이러한 국민정치 노선은 현대 정치학의 용어로는 ‘헤게모니(hegemony) 전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서민대중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되 이것이 이들뿐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식으로 정당화함으로써 다른 사회계급, 계층도 이에 반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선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류화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노동자계급에 기초한 사민주의 정당이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억압에 저항할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별의 해소를 통해 계급갈등을 완화시켜 사회통합을 실현하며 스웨덴 국민과 나라 전체의 발전을 주도해간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장남 전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즉 사민당이 반항심 많고 사회의 운영을 맡기기에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차남’이라기보다는 책임감 있고 유능한 ‘장남’, 특히 사회 구성원 중 약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속 깊고 마음 따뜻한 ‘장남’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보이도록 노력하고 또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담당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발전시켜가는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손은 이런 ‘주류화 전략’의 구현을 위해 스웨덴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사민당이 당시 스웨덴 사회의 불평등에 저항하는 정당이기도 하지만, 스웨덴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 요소를 제대로 계승하고 더 발전시켜가는 정당으로 보이도록 노력한 것이다. 한손의 이러한 ‘애국주의적’ 입장은 단지 정치전략의 소산이라기보다는 그의 진정한 마음의 발로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손은 애국주의에 대해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다. 애국주의는 뿌리 깊은 인간 심성의 발로이며 바른 방향으로 인도될 경우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공산당을 비판할 때에 폭력혁명까지 불사하는 급진적 입장을 비판하였을 뿐 아니라 코민테른을 추종하는 공산당이 스웨덴의 전통과 문화에 이질적인 외래이념 정당이라는 측면도 비중 있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일 공산당이 사민당이 주도하는 정부에 들어와 함께 일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외래이념 정당적 성격을 머지않아 탈피하여 스웨덴의 풍토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는 방향으로 변화해갈 수 있으리라 전망하기도 했다. 또 그러다보면 결국 사민당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둘째, 부르주아 세력과의 협력가능성을 중시하는 노선을 들 수 있다. 스웨덴에서는 이런 노선이 ‘상호이해(samförstånd) 노선‘이라 불려왔다. 사민당은 부르주아 정당들과도 사안별로 상호이해에 기초하여 협력할 수 있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도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민당이 1933년에 농민당과 정책협력을 이루고 1936년에 농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 그리고 1939년에 모든 부르주아 정당들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한 것이 이러한 ‘상호이해 노선’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또 한손은 1928년 총선 이후 사민당이 가급적 계급투쟁 담론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전쟁 이후에도 거국내각을 유지하려 했다.

한손의 이런 협력노선은 한편으로는 정치전략의 소산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손의 사회관의 표현이기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사민당이 계급투쟁을 예리하게 강조해서는 소수파 지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계급 간 협력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또 1930년대에 유럽 전역을 휩쓴 파시즘의 물결이 스웨덴에 상륙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계급투쟁보다는 국민 전체의 이익과 계급 간 협력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여러 연구자들은 그 뿐 아니라 한손의 사회관 자체가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이한 계급들 사이에서도 상당 정도 상호이해와 협력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었다고 평가해왔다. (Fredriksson, Gunnar, Dieter Strand, Bo S?dersten 1970: 59-61; Tilton 1990: 138-139). 이들에 따르면 한손은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구성원간의 협력과 상호이해를 극대화하자는 이념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상이한 계급 사이에, 또 서로 다른 정치집단 사이에 상호이해와 협력이 상당 정도 가능하며 이를 강화해가는 것이 사회를 보다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개조해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평등주의적 개혁을 지향하는 사민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 의제들을 주도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민주주의를 최우선시하는 이념노선과 담론전략을 들 수 있다. 한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민주주의 담론 속에 사회주의적 가치와 정책을 용해시키는 담론전략을 구사해갔다. 즉 민주주의의 극대화가 바로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민당의 이념과 정책을 국민들이 더 쉽게 수용하도록 하기 위한 전략적 고려의 산물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손의 사고 자체가 그러했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보통선거권, 복수정당제, 다수결 등 정치제도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지위를 개선시키는 모든 제도와 정책, 운동을 의미했다(Fredriksson, Gunnar, Dieter Strand, Bo S?dersten 1970: 30). 절차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내용이었고 사회복지제도의 확충, 노동자 경영참가 등도 모두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주요 내용들이었다. 결국 사회주의란 민주주의 원리가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가고 심화되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한손이 공산당을 비판한 핵심적 근거의 하나도 공산당이 민주주의 원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한손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대립구도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구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넷째, 긍정적 가치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담론전략을 들 수 있다. 한손은 자본주의 사회와 자본가계급을 비판하는 부정적, 소극적(negative) 담론보다는 사민주의 운동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긍정적인가를 부각시키는 적극적(positive) 담론을 즐겨 구사했다. 사회주의적 가치들이란 사회구성원 간의 우애와 연대, 상호지원, 타인에 대한 배려, 사회 전체의 이익에 대한 헌신 등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가장 따뜻하고 고상한 가치들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했다.

한편 한손의 리더십 스타일에서 발견되는 대표적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대중성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한손은 서민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 이념 논쟁을 기피하였으며 대중의 일상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하고자 했고, 사민당이 추진하는 정책들을 대중의 일상생활과 관련지어 설명하려 했다. 또 그는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에 직면할 때에 사민당 엘리트나 관료들뿐 아니라 서민대중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많이 들으려 애썼다고 한다. 또 한손의 성장배경과 인품 자체가 매우 서민적이기도 했다. 그는 소탈하고 검소했으며 축구에 열광하는 등 취미도 대중적이었고 학식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오랜 기간 사민당 2인자로서 한손을 보좌했던 비그포르스에 따르면 한손은 “대다수 대중의 삶을 채우는 생각과 감정, 희망을 공유했다”는 것이다(Ibid., p. 13).

학식이 부족하여 자신의 사고를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제시할 능력이 없었던 한손은 사실 스웨덴 사민주의 이념사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에 비하면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경제정책가라 할 수 있는 비그포르스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스웨덴 사민주의 이념사를 다룬 스웨덴 내외의 주요 연구들에서 한손은 비그포르스에 비해 거의 주목받지 못해왔다. 그러나 스웨덴의 평범한 대중의 입장에서는 한손이야말로 ‘우리 편’이자 ‘우리 사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손의 말과 생각, 그리고 삶의 이력 전체가 서민대중의 고통과 희망을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사민당 내에서 한손은 자주 ‘P. A. Folk'(페르 알빈 인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하는데(Myrdal 1982: 210), 이는 한손이 ’folk'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스웨덴의 평범한 인민의 정서와 관심을 체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짐작된다.

둘째, 포용력과 결단력을 겸비한 리더십을 들 수 있다. 한손이 이끄는 내각에 참여한 바 있는 뮈르달의 회상에 따르면, 한손이 주재하는 당 지도부 회의나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매우 자유스러워서 다양한 의견들이 거침없이 제시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손은 주로 말없이 경청하다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진 후에 최종결론을 제시하였는데 일단 한손이 결론을 내리면 누구나 두말없이 수용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한손이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회의 참석자들 대부분이 한손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것은 대개 틀림이 없더라는, 과거 경험에 기초한 믿음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손은 다양한 의견들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래 입장을 수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한손이 내린 결론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고 한다(Myrdal 1982: 207-208). 그만큼 한손이 열린 마음으로 사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한손은 또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1928년 총선에서의 패배 이후 사민당의 노선과 조직을 크게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반발에 부딪쳤지만 자신의 노선의 정당성에 확신을 가지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안으면서 자신의 노선을 관철시켜간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한손의 정치노선과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이념적 입장에 따라 사뭇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예컨대 공산주의자나 사민당 내 급진파의 입장에서는 한손이야말로 사민당을 보수적인 방향으로 이끈 원흉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공산주의 계열의 저자들이 집필한 스웨덴 노동운동사 책자는 한손을 ‘기회주의의 화신’이라 비난하고 있다(Kristensson, Kaj., Hans Nyström, Örjan Nyström 1985: 295). 또 대부분의 핵심 사안에서 한손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한손에 비해서 좌파적 성향이 강했던 비그포르스는 한손이 애용했던 ‘인민의 가정’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아서 한 번도 이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민주의자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가부장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이 강한 용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Helldén 1991: 496; Fredriksson, Gunnar, Dieter Strand, Bo S?dersten 1970: 43). 또 한손이 이끈 거국내각의 중립노선의 핵심이 사실상 나치 독일에 대한 수동적 양보정책이었다는 점은 스웨덴 국민들이 깊은 역사적 콤플렉스를 갖는 대목이다.

그러나 반면에 한손의 노선을 계승해온 사민당 주류의 입장에서는 한손의 정치노선과 리더십 스타일이야말로 사민당이 대중의 폭넓은 공감을 끌어내어 장기 집권과 지속적 개혁을 달성할 수 있게 해준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또 대다수 스웨덴 국민에게 한손은 스웨덴 현대사 최대의 대내외적 국난으로부터 스웨덴 국민을 구출해낸 ‘국부’로 인식되어왔다. 한손의 정치노선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모두를 포함하여 스웨덴 사민주의 운동은 지금까지도 대체로 한손의 노선 위에서 발전해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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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litical Line and Leadership of Per Albin Hansson

 

Jeongwan Shin

SungKongHoe University

 

Per Albin Hansson was the most prominent political leader in modern Swedish politics. He served as the chairman of the Swedish Social Democratic Party(1928-46) and as the prime minister of the Swedish government(1932-46). In late 1920s and early 1930s, he transformed the Swedish Social Democratic Party into the united, politically strong, and dedicated reformist party. He rejected the traditional 'class politics' and instead accepted 'mass politics' for broadening political base of the Swedish Social Democratic Party.

As the prime minister, he overcame the Great Depression by Keynesian macroeconomic policies, assisted by the minster of finance, Ernst Wigforss. And he rescued Sweden from the Second World War by firmly holding on to neutrality policies.

His political line is characterized by mass politics, mutual understanding and cooperation with bourgeois parties and capitalists, dedicated holding on to democracy, and discursive strategy stressing the positive values of socialism. And his leadership style is characterized by popular appeal, broad-mindedness, and decisiveness. His political line and leadership style greatly contributed to the political success of the Swedish Social Democratic Party.

 

Key words: Per Albin Hansson, political line, leadership style, mass politics.          

 

 

 

 

 

 

참여댓글 (1)
  • 제로드
    2013.12.26 06:36:26
    잘 보았습니다. 뉴스타파에 나온 스웨덴의 길 동영상보고 와 보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