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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비와 아이의 서울 나들이. (세월호 사태 관련 글짓기)

2015년 4월 16일은 세월호사태의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각종 미디어와 SNS를 통해서 그날의 참담함과 어처구니없음을 접하며 수많은 국민들과 같이 격분했었다.

 

그리고 서러웠다.

 

돈 없고 힘이 없으면, 이렇게 짓밟고 짓이겨도 되는 것인지...

 

다른 이도 아니고, 그것도 국가가 말이다. 우리들의 세금으로 지탱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공권력이 말이다.

 

지금이 왕정국가 시절인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인가?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는 여기 딴지일보 게시판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그런 것에는 별 관심도 없던 이였다. 그저 내 한 몸 건사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고 남들만큼만 여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많은 서민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았었다.

 

대구의 어느 식당에 가나 널려있던 찌라시 조중동 신문의 사설이라도 봐야 ‘세상 돌아가는 눈이 까막눈은 되지 않겠지.’라며 열심히도 주섬주섬 챙겨보며 다행스럽게도 까막눈은 뜨이게 되었다.

 

그것은, 그런 찌라시들은 신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들의 사설에서 알게 되었다.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수구세력들의 홍보용 전단이었고, 가진 것들의 흘린 것이나 주워 먹어도 행복해 할 ‘나비가 되기를 포기한 채 겹겹이 쌓인 애벌레들’의 눈과 귀를 막아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 동안 세월호 사태에 대해서 게시글을 적기가 힘들었었다. 어린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그 아이들을 가슴에 품은 채로 오열하는 유가족들에게 내 앞만 보고 살았던 시절이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게시글을 작성할 기운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세월호 1주년 추도식이 대구에서도 열린다는 소식을 정의당 대구시당의 문자를 받고서 생애 첫 집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생애 첫 집회에 참가하는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다.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을 거스르지 마라.’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중간치는 한다.’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을 거스르면 손해 본다.’

라고 수업시간을 쪼개가며 설명해 주시던 기술선생님의 설명에...

‘어, 저건 아닌데...’

라며 고개를 갸웃해했었던 내가, 살아오면서 남의 분란에 끼어들었다가 괜히 머쓱해진 누구나 간직할만한 경험들로 인해서 남의 일에 나서는 게 머뭇거려지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리고 천성이 나서는 걸 거부한 탓인지 술기운이 아니면 숫기 없는 성품이 드러나 늘 ‘부끄럼쟁이’이고, 괜시리 심각한 ‘똥상 얼굴’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태에 관해서만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분노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내가 사는 지역 대구의 일터에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죽은 자식 팔아 한 몫 챙기려 한다.’느니, ‘사고 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요란을 떠느냐.’란 소리를 들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목에 서슬을 담아 침을 뱉듯 말을 했었다.

 

‘당신도 자식을 키우면서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

과연 당신 새끼가 그렇게 산채로 수장되어도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겠느냐!

모르고, 관심 없으면 차라리 숟가락이나 얹지 마라.

모르는 게 자랑도 아니니, 생각 없이 함부로 남에게 비수를 꼽지 마라.

온 사방에 널린 게 정보인데, 조중동 쓰레기 몇 조각 읽은 걸로 내 앞에서 잘난 체 하려거든 내가 창피를 줘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고, 늘 그랬듯이 뻔뻔하게 살아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사는 게, 얼마나 짐승 같은 짓인 줄은 알고는 살아라.’

 

이런 악다구니를 눈깔에 살기를 담아 내뱉기도 하고, 달래듯 순화해서 말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세월 앞에는 장사 없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지쳤고, 서서히 그에 대한 서슬이 녹아들어 근래에는 그런 상황에 외면해 버리기 일쑤였었다.

 

그 동안의 내 삶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지치고 기운 없으면 내 아이들은 누가 지켜주겠느냐는 이기심이 나를 설득해 가던 중이었다.

 

4월 16일. 대구백화점 앞에 마련된 빈소로 가서 분향을 하였다. 혹여나 누가 볼세라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을 재빠르게 눈을 부비는 척 닦아내어도 충혈 된 눈시울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주위에는 평소 안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고 동성로에서 화장품 가게를 하시는 사촌형님의 가게 사무실로 피신해 버렸다.

 

형수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얘기는 자꾸만 길어지고, 휴대전화에서는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집회참가자들이 나를 찾는 전화였었다.

 

걸려오는 전화로 핑계를 대고 주섬주섬 거리며 가게를 나와 대열에 참여하니 건설노조와 노총이 결의대회를 하며 많은 자리를 메우고 앉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단상을 통해 하고 있었다.

 

‘형님, 세월호 문제나 노동운동이나 일맥 통하는 것이 있다 하여도 오늘 여기서 이카는 거는 씹기 좋아하는 것들에게는 좋은 빌미거리이기도 하겠는데, 오늘 같은 날 꼭 저래 밥숟가락을 얹는 게 좀 그렇습니다. 하기사 저렇게라도 자리들을 메워주니 고맙기도 하지만, 좀 씁쓸하네요...’

 

함께 있던 아는 이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듣는 이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노조 측의 결의대회가 끝나고, 평소 알고 지내던 정의당 대구시당 사무장님이 단상에 올라와 유가족 중의 한 부모를 소개해 주었다.

 

희생된 아이의 아버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시었다.

 

그는 우선 대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부터 먼저 꺼내었다. 그가 처음 대구에 와서 단상에 올라서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무척 꺼려지더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는 현재 이 사태의 주요 문책대상인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정치텃밭인데다가 이런 곳에서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광장을 메우고 앉아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대구시민들에게 너무나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리시는데... 과연 그가 가졌던 의문에 누가 감히 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태의 경위와 사태의 처리과정에서 있었던 불합리한 일들을 소개해 주었다. 유가족들과 희생자 아이들의 휴대전화 통화내역과 일체의 데이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거대한 작업을 가능케 할 수 있는지 되물었다. 그나마 희생자 아이들이 휴대전화를 모아서 비닐봉지에 꽁꽁 싸서 담아두었던 덕에 동영상이 유포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 개새끼들의 치밀함에 나는 또 한 번 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고가 나기 이전과 사고가 난 이후의 자신이 가졌던 사회에 대한 관심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정작 자신은 남의 일에, 이 사회의 모양새에 눈길조차 없이 살며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었는데, 정작 자신들에게 억울한 일이 생겼으니 도와달라는 말이 너무 뻔뻔한 것 같다고 하였다. 마치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시체팔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었다.

 

그리고 희생된 아이의 어머니께서 연이어 말을 이으셨다.

 

그분도 아버님이 마지막에 했던 말과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게 낯설고,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것이 습관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들 특유의 온화함과 반복되어진 연설에도 불구하고 어색함이 묻어나는 그녀에게서 오는 진정성은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분들의 연설이 끝나고 합창이 시작 되었을 때, 대구시당 사무처장이 나를 찾아 왔다.

 

“재은이 형, 이따가 합창 끝나갈 즈음에 분향소 앞으로 와요.”

“왜요?”

“형이 플랜카드 좀 들어야겠어요.”

“그런 거는 젊은 친구들 시키라. 오늘 젊은 친구들 마이 와뜨만.”

“에이~ 갸들은 오늘, 따로 준비해 둔 거 해야 된단 말에요.”

끄응~

‘나는 그런 거 억수로 하기 싫단 말이야.’란 말이 목구녕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알았으요.”

“거봐요. 시키면 잘 할 꺼면서, 하하하”

깊은 한숨과 함께 묵직하게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사무처장이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행진은 시작되었고, 난생 처음 참가하는 집회에 6미터짜리 현수막을 다른 사람과 함께 펼쳐들고 도로를 행진했다. 집회에 이골 난 이들이 선창을 하면 많은 이들이 따라서 큰소리로 복창했지만, 그것까지는 내게 무리였다.

 

그때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게 다였다.

 

그 다음날, 17일 금요일 저녁에 강동마을공동체에서 지역의 각 시민단체들과 모여서 어린이날 행사를 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런 모임의 회의 뒤에는 단합을 핑계로 먹고 마시자 뒤풀이를 가지는 게 일상사이다. 만날 때마다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그 날도 새벽 3시 반이 넘어서 겨우 자리를 뜰 수가 있었다. 물론 술만 마시면 숫기가 사라지는 나의 주저리주저리도 끝 간 데가 없었다.

 

4월 18일, 알람소리에 눈을 떴지만, 숙취에 도저히 일어나지를 못해서 9시가 다되어 겨우 일어나 사무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날은 서울의 청와대 앞 도로에서 인간 띠잇기를 하는 날이었고, 나와 5학년 된 딸아이 ‘발해’도 참가를 한다고 해놓은 상태였다.

 

‘형, 오시는 중이신가요?’

‘아니, 인쟈 일어났는디요.’

‘9시 반에 출발하는 거 아시죠? 빨리 오세요.’

‘10시에 반월당이 아니고?!’

‘아, 진짜~ 10시는 성서 홈플러스 앞이고요.’

‘아, 씨바! 카믄 좃됐네?’

‘빨리 서둘러 와요. 얼마간은 기다려 줄 테니까.’

‘안 돼, 딸래미도 데리러 가야된단 말야.’

‘같이 안 있어요?’

‘따로 살잖아.’

‘카믄, 어떡해요.’

‘성서에서는 몇 시에 출발해요?’

‘거기가 10시 출발이에요.’

‘카믄, 거기서 10분만 기다려줘요.’

‘알았어요. 빨리 빨리 서둘러요.’

 

사무처장과 전화를 끊자마자 발해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해는 씻고 있나?’

‘아니, 오늘 토요일이라고 늦잠자고 있는데?’

‘아씨, 오늘 서울 간다꼬 안 카드나!’

‘내일 간다꼬 안캣나?’

‘아씨~ 내가 언제!’

‘아이면 아이지, 와 고함질이고, 아침부터!’

‘야, 고함은 니가 버럭거리네. 나는 그냥 다급해서 목소리가 커진 거고.’

‘니 지금, 늦었제?’

‘응, 좃 됐삣따.’

‘카믄, 빨랑 아 데불꼬 가야지, 전화로 노닥거리노!’

‘알았따. 오토바이 끌고 갈 낄 기네, 발해 슈트 입혀놓고 장갑 끼워 놔라.’

 

바이크가 차보다 많이 빠른 탓도 있지만, 주차시간을 대폭 줄일 수가 있어서 바이크를 끌고 가기로 했다.

 

마음이 급한 탓에, 출발할 때마다 앞바퀴는 수시로 들썩거리고, 급정거 때마다 엔진브레이크를 쓰느라 바이크의 엔진은 떠날 갈 듯이 굉음을 내질렀다.

 

그렇게 두 대의 전세버스 중 한 대에 간신히 올라타서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마이크를 손에 잡은 사무처장이 집회의 일정을 소개 하였고, 4월 16일 세월호 사태 1주년의 행사에서 있었던 경찰과의 충돌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웃음을 섞으면서 ‘사태가 급박해지면 각자 본인이 선수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알아서 선두에 서 주시리라 알겠습니다.’라는 살벌한 언급을 하였다. 이에 좌중은 웃음바다를 이루며 너나없이 한마디씩 던졌다. ‘요새 선수들 녹슬어가 뛰기나 잘 하겠나.’ ‘왕년의 선수들 자기 늙은 거는 생각 않고 덜컥 뛰어 들어가서 젊은 친구들한테 민폐는 안 돼야 될낀데.’

 

이렇게 왁자지껄 웃으며 떠드는 소리에 사무처장이 한 마디를 거들었다.

 

‘연행되는 거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아무쪼록 다치시는 일은 없기를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이미 접전을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소개가 마이크를 건네며 이어졌고, 늑장으로 인해서 맨 앞자리에 앉았던 나에게 마지막으로 차례가 돌아왔다.

 

‘저는 정의당 0구당원 권재은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5학년 된 딸아이와 함께 집회에 참여하는데, 딸아이에게 좋은 꼴 많이 보여줄 것 같아 마음이 참 찹찹합니다.’

 

내가 말한 ‘좋은 꼴’의 의미를 모두가 알기에 잠시 동안 버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발해에게 집회에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에 서두른 탓인지, 아이는 똥이 마렵다고 웅크리고 있는 통에 도통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선산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는 동안 아이는 화장실을 쓸 수가 있었고, 나는 화장실 옆의 흡연 장소에서 지인들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 옆에 낯익은 통진당 사람들이 눈에 뜨여서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정의당 당원들은 그들과 웃으며 인사를 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지는 않았다. 그들의 당이 해산된 것이 서로를 더욱 서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구세력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결과이기도 하였다.

 

버스가 선산휴게소를 떠나자, 화장실을 다녀온 아이는 그제야 밝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이 마치 여행하는 것만 같은지 마냥 신이 나 있었다. 다만 저도 눈치가 있는지 티는 내지 않았다.

 

아이의 휴대폰에서 위키백과를 열어 세월호 사태에 관한 내용을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얘기해 주었다. 한참 뒤에 아이가 다 읽어 보았다기에 ‘이해가 좀 되드나?’라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어.’라는 예상된 대답이 돌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 된 아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이유로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여주 휴게소에서 점심식사를 갖기 전까지 계속해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들었다.

 

‘아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그러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 곧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니 눈으로도 직접 보게 될끼다. 똑똑히 보아두고, 절대로 잊지 말그라.’

 

여주 휴게소에서 아이와 직접 메뉴를 골라 야외에 마련된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해나갔다. 화창한 날씨에 맑은 연못을 옆에 두고 아비와 딸이 정겹게 끼니를 나누었다.

 

‘발해야, 니하고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함께 있으니까 무척 좋네.’

‘아빠, 연못에 물이 억수로 맑아.’

‘근데, 세월호 유가족분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같은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게 마음 아프다.’

‘근데, 연못에다가 누가 쓰레기를 버리나봐. 쓰레기가 많아.’

‘야이 가시나야, 사람이 말하면 집중 좀 해라!’

‘아빠.’

‘왜!’

‘알고 있거든...’

 

아이의 말에 내가 머쓱해졌다. 아이가 엄마를 닮아 나처럼 가볍지 않아 다행이다.

 

버스가 서울 시내를 꿰뚫고 시청 앞 광장에 우리들을 내려주었다. 대구일행이 광장에 자리를 잡고서도 많은 사람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아이는 또 다시 복통을 호소했고, 아이를 시청청사 아래의 화장실에 데려다 주고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그 앞에 정체모를 기독교단체가 ‘박원순시장 OUT’이라는 팻말을 들고 마이크로 떠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 마이크를 통해 나온 엠프 소리가 찢어질 듯이 컸어도 멀리까지 전해지지는 않아 세월호 사태 집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민주노총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이틀 전과 같은 불편한 심정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새로운 노동문화를 개척해보고자 앱을 만든답시고 다니지만 이런 숟가락 얹기에는 마음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노동단체에서 얼마나 많은 힘을 보탰는지는 모르겠지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는 말이 있지 않나...라는 것은 그저 나의 기우이기를 바란다. 그들이 세월호 추모제와 유가족들의 요구투쟁에 힘을 실어 주기위해 그날의 노동운동 결의대회를 빌미로 모였기를 믿고 싶다.

 

노동단체의 결의가 끝나고, 몇몇 인사들의 노래와 연설이 있고나서 한 유가족의 어머님이 단상에 올라섰다.

 

유자족분들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피해자이지 가해자이냐며 호소했다. 그렇게 그녀는 울분을 토하다가 이 나라의 대통령에게 갖은 쌍욕을 퍼부어 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악에 바친 그녀는 결국 마이크를 집어 던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부짖으며 쓰러져버렸다.

 

나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아빠가 우는 거 처음 본다.’라며 아이가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이 문장을 타자 치며 지금도 눈물을 훔치고 있다.

 

어떻게... 씨발... 사람이 사람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할 수가 있는가!

제 아이가 산 채로 수장된 유가족이 사태의 진실을 좀 더 뚜렷이 알고 싶다는 게 주된 목적이라는데, 그런 이를 구속까지 했어야만 하는가!

 

누군가의 연설을 듣는 집회는 유가족 어머님이 쓰러지심과 함께 그 시간부로 바로 끝을 맺고,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아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대구에서 온 깃발을 따라 어딘가로 이동을 했다.

 

낯이 익은 청년당원이 들고 있던 현수막을 달라하여 내 아이와 함께 펼쳐들었다.

 

‘껀발해, 우리, 여기에 놀러온 거 아니야. 현수막 팽팽해지도록 바짝 당겨서 걸어.’

‘응.’

다행이 아이는 밝고 경쾌하게 대답해 주었고, 어떤 여자분께서 내 뒤에서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구분들은 자제분을 터프하게 키우시네요. ㅎㅎ'

내가 등에 멘 가방에 ‘진실을 인양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 천조각의 아래에 있는 ‘정의당 대구시당’이라는 문구를 보셨는가보다.

 

여식아이의 체구가 작은데다가 햇빛을 가리려고 급하게 사준 별모양의 밀짚모자가 눈길을 끌었던지, 누군가가 다가와 연신 카메라를 찍어댄다. 가슴조린 나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V자를 그리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사뭇 엄숙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광대 같은 행동으로 그 순간을 메우고 싶지는 않았다. 청계천을 지나면서 토요일 오후를 즐기는 시민들을 보니, 이틀 전에 대구에서 밤거리를 행진하며 건물 속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우리를 쳐다보던 대구 시민들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아이가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빠, 저기 물가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해주면 더 좋을 텐데. 그쟈?’

‘그러면 더 좋겠지만, 혹시라도 저들을 비난하는 마음은 절대로 갖지 말그라.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너무 쉽게 삿대질을 하는 것도 옳은 것만은 아니야. 솔직히 발해 너도 아빠가 같이 가자 안 그랬으면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꺼 아이가...’

 

청계천을 따라가다가 다리하나를 건너더니 일행은 잠시 행진을 멈추게 되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경찰들이 차벽을 이뤄 길을 막고 있었다. 행진하는 이들과 잠시 동안의 말다툼이 있었지만, 차벽의 한쪽 모통이로 돌아서 가게 되었다. 차벽 위에서는 경찰들이 집회참가자들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고, 격분한 시민들 중에 몇몇이 그 경찰들을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붓기도 했었다. 그러면 경찰들은 마치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한 말투로 ‘네, 네. 잘하고 계십니다. 지금 하시는 폭력행위들 반드시 채증자료로 잘 남겨 두겠습니다.’라면 시민들을 조롱했지만, 시민들에게 돌려받은 건 쓴 소리뿐이었다.

 

‘아빠 저기 버스 위에 경찰아저씨들 왜 저래 깐죽거려?’

‘쟈들은 시민들이 난폭하게 변해서 폭도로 몰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가보지, 뭐.

이런 그들의 모습을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가 두 눈에 똑똑히 새겨 넣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잇길을 지나 더 나아가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대구분들은 이리로 모여 보세요.’

그러던 중에 대구시당 사무처장이 따로 시당원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 경찰이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진입로를 차단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각자 흩어져서 알아서 광화문 9번 출구 앞, 세종문화센터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청년당원 몇 명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차피 서울지리는 까막눈이니까...

 

‘서울 지리는 좀 아시나요?’

그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물었다.

‘저한테도 서울은 집회할 때나 가끔 오는 곳이죠.’

 

모두들 어이없는 웃음뿐이다.

 

휴대전화기의 네비게이션을 보니, 그때 있던 위치의 바로 근처가 광화문 광장이었다. 경찰의 차벽을 피하느라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서 빙 둘러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다. 그 당시의 내가 느낀 것은 광화문광장까지의 도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집회에 참여하려는 시민들의 이동 경로를 피로하게 만들어서 그 수를 줄이려는 게 경찰의 의도였던 것 같다.

 

도착한 광화문 광장의 경찰 차단벽 가운데에는 세종대왕님의 동상이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성을 굽어 살피시었다는 세종대왕님께서는 그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아빠, 지금 경찰이 우리들을 가로 막은 거야?’

‘응.’

‘왜?’

‘몰라. 궁금하면 니가 가서 한 번 물어봐.’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계단에 모여앉아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와 몇몇은 담배를 피우러 도로가로 나갔다.

 

‘예전에 시위대에서 힘깨나 썼었죠?’

기골이 장대한 그 청년은 나와 몇 번 대화를 나누 적이 있는 이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정도 적은 걸로 기억한다.

(몇 번을 들었는데, 나이차이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냐 싶어 늘 까먹는다.)

‘예전엔 많이 살벌 했었죠.’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 또래가 92학번으로 학생운동의 마지막 전성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 또래들이 군대를 갔다 와서 졸업할 즈음에 IMF사태가 터졌고, 경제적인 압박은 학생들을 시위대가 아닌 도서관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연이은 두 대통령이 국민의 알권리를 막지 않은 덕에 쇠파이프나 화염병을 든 시위대는 어느덧 그 필요성을 잃어갔다.

‘고생깨나 했겠네.’

내가 슬며시 미소 지어 주었다.

‘쇠파이프로 전경한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턱이 다 안 벌어져요.’

그가 입을 조금만 벌리며 턱을 움직이는 시늉을 해보이다가 히죽이 웃는다.

‘그 때 어금니가 다 털려서 제 이빨이 몇 개 없어요.’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입 닥치고 있었다.

 

회의 때마다 언제나 과묵하게 휴대전화기로 게임만하고 있던 그 청년은 담배를 다 피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키를 어슬렁거리며 앞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검은색 가죽 장갑이 꽉 쥐어져 있었다.

 

패싸움의 살벌한 경험이야 내가 어찌 그 청년 못지않겠냐 만은, 그가 던졌던 청춘을 나의 경험에 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던 기개는 그의 넓은 등짝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하염없이 기다릴 것만 같았던 대치 상황에서 시위대의 선봉이 형성되었는지 경찰차벽의 맨 끝부분인 세종문화회관의 어느 한 기둥아래에서 경찰과 밀고 당기는 접전이 벌어졌다.

 

모두들 우르르 그리로 몰려갔고, 사람들은 구호의 함성으로 접전을 벌이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아빠 목말 태워줘. 나, 안보여.’

‘아빠 디다(힘들다). 안보이면 그냥 보지마라.’

‘아, 빨리 빨리.’

아이의 재촉에 별 수 없이 목말을 태우고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의 어느 한 기둥에서 15미터 정도의 거리를 간격 두고 있었다.

 

 

 

함께 있던 일행 중에 청년 한 명이 급하게 물병을 수집하더니 접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한참 뒤에 돌아온 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유부남들은 일선에서 빠지라니까...’

사무장님이 그 청년의 손가락에 감겨진 붕대를 살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아, 저도 눈 씻을 물병만 전해주려고 했는데, 간 김에 철망 잡아끌다가 그만...’

 

‘아빠, 저 아저씨 눈이 왜 저래 빨게?’

‘매운 성분인 최루액을 눈에다가 경찰이 뿌려서 그래.’

‘아빠, 아저씨 옆에 있는 나도 매운데... 아저씨 많이 아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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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검은 가죽장갑을 손에 꽉 쥐고 있던 키가 큰 청년은 접전이 벌어지던 그 한참동안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접전이 벌어진지 30분 정도가 흘러서 경찰의 차단벽은 무너졌다. 무너진 차단벽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에게 경찰은 물대포를 쏘아대며 발악을 했지만, 밀려드는 시민을 두려워한 그들은 대치선을 버리고 광화문 50여 미터 전방에 미리 준비해둔 이중의 차량 벽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아이가 포함된 사람들은 뚫려진 차단벽을 통해 속속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갔다.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던 세종문화회관의 어느 한 기둥 옆을 아이와 지나면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빠, 바닥에 온통 물이야.’

‘경찰이 아까 쏜 물대포 때문인가 봐.’

‘물대포 맞으면 아파?’

‘그거 맞으면 아빠 같은 남자어른도 똑바로 서있을 수가 없어. 근데 그걸 얼굴에다가 직접 맞기라도 하면... 마이 아프겠제?

그리고 그런 물대포를 사람에게 직접 쏘는 건 불법이야.’

‘경찰이 불법도 해?’

‘응. 너도 봤잖아.’

 

그렇게 아이와 손을 맞잡고 대화를 나누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정부청사 옆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백여 명의 전경들이 앞쪽에 검은 방패를 앞세우고 일렬로 길게 늘어서며 서로의 팔짱을 꽉 끼우고는 대열을 이루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조금씩... 척, 척, 척... 거리는 워커소리를 내며 인도 위를 걷던 사람들에게로 접근해 왔다.

 

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서서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멈춰 섰다.

 

그 경찰들이 1미터 거리로 내 코앞에 다가왔을 때,

 

‘으아아아앙~’

 

딸아이 발해가 울음을 터트렸다.

 

‘야이~ 개쌔끼들아!’

나의 크나 큰 고함소리에 경찰들이 일순간 정지했다.

 

‘너네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말해 봐,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짓이냐고!

너네 눈까리에는 여기 이 어린 애가 보이지도 않냐!’

 

‘으아아아아앙~ 아빠 무서워.’

발해는 내 몸에 찰싹 들어붙었다.

 

‘이게 사람이 할 짓거리냐, 이 씨발놈들아!’

내 바로 앞에 선 수많은 전경들은 내게서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얼굴을 돌리지는 못했다. 의무복무를 하는 그 젊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 또한 의무군복무를 해봤으니 그네들의 복잡한 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전경 젊은이들은 그런 복잡한 심정을 생각할 겨를조차도 없었을지 모른다. 상황이 긴박할수록 상급자가 쪼아대는 강도는 더욱 더 강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눈까리 돌리지 말고, 내 눈 똑바로 봐, 이 새끼들아!

그리고 여기 이 아이가 울고 있는 것도 똑바로 쳐다보란 말야, 이 씨발놈들아!’

내 앞에서 스크럼에 짜여져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전경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걔 중에 몇몇은 아예 눈을 내리 깔아버리거나, 하늘 쪽 허공으로 눈을 돌려버렸다.

 

‘누가 이러라고 시켰어. 엉! 누구냐구!’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꽉 짜여진 스크럼에 스스로가 꽉 끼여 버린 그들에게서는 그저 거친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부로 보이는 경찰 한 명이 내 왼쪽에서 무전기를 손에 들고 전경들을 손짓하며 지휘하고 있었다.

 

‘이봐! 당신이 시켰어?!’

간부로 보여 지는 이를 향해 내가 고함소리와 함께 삿대질을 해댔다. 그가 곁눈질로 나를 힐끔거리는 걸 내가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듯 계속해서 전경들을 지휘해 나갔다.

 

‘눈까리 굴리지 마, 이 개새끼야!

니가 힐끔거리며 나 쳐다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의 연이은 고함 소리와 삿대질에도 그는 여전히 못들은 체 하며 대열을 정비해 나갔다.

 

‘너도 이 아이 또래의 자식이 있을 꺼 아냐!

부끄러운 게 뭔지도 좀 느끼고 살아, 이 개새끼야!’

간부는 나의 고함소리가 난감했던지 슬금슬금 옆걸음을 치며 멀어져 갔다.

 

딸아이만 없었더라면 다가가 멱살이라도 부여잡고 싶었다.

 

그 때,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날 아침에 늦잠을 잔 통에 서둘러 아이엄마 집에 도착해서 분주하게 아이의 짐들을 챙기는 동안, 아이엄마가 발해에게 바이크 헬멧을 씌어주며 아이에게 당부하던 말이 있었다.

 

‘너거 아빠, 설치고 나대거든, 니가 다리끄댕이 꽉 붙잡고 놔주지 말그라이. 알았제?’

아이엄마가 헬멧을 양손으로 동시에 툭툭 치며 딸아이에게 당부했었다.

 

‘알았어, 엄마. 걱정하지 마. 아빠는 내가 잘 챙길게.’

 

그랬던 그 딸아이가 내 바지춤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경찰대열을 향해 비난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린 아이에게마저도 위협을 가할 수가 있냐!’며 삼삼오오 몰려들어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이런 시민들의 야유에 경찰 대열은 발걸음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게서 서너걸음 물러설 때까지도 나는 꼼짝 않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딸아이는 내 옆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야이 씨발놈들아! 대가리의 뇌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냐!

생각 좀 하고 살어. 이 씨발새끼들아!‘

연이은 나의 욕지기에 나이 지긋한 시민 한 분이 내 등을 어루만지시며 ‘욕은 참으세요.’라며 나를 달랬다.

 

‘새끼가 산채로 수장된 부모가 억울해서 울부짖는 게 그리도 못마땅하냐!

너 네가 사람이냐?! 괴물이냐?!

우리가 낸 세금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내는 거지, 이렇게 겁이나 주라고 내는 게 절대 아니야!’

이 말을 끝으로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광화문 앞에 늘여놓은 경찰 차벽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어가는 동안, 겁에 질렸을 딸아이를 달래자, 아이는 다시 씩씩하게 기운 내어 밝은 미소로 아빠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그 때는 몰랐는데, 발해가 우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딸아이를 달래 주었고 아이의 주머니에 너나없이 주전부리를 넣어주고 갔었다고 다음날 딸아이가 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저녁, 딸아이의 호주머니에서는 끊임없이 주전부리가 주섬주섬 기어 나왔다.

 

그 일을 딸아이는 제 아비에게 다음 날이 되어서야 씨익 웃으며 실토 하였다.

 

‘아빠 나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 호주머니마다 과자가 항금(많이) 들어 있더라. 어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계속 뭘 내 주머니에 넣던데, 그게 다 꽈자였나봐.’

 

( 아비와 여식의 거래 장부를 다시 정리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ㅡ,.ㅡ )

 

 

‘아빠, 저기 길가에 늘어선 경찰차들은 다 뭐야?’

정부청사 맞은편에 있는 너른 도로를 가리고 있던 차벽을 가르치며 딸아이가 물었다.

‘차벽 아이가.’

‘근데, 사람들이 아무도 저리로 가지 않는데. 왜 저 차들은 저기에 저렇게 많이 있어?’

‘서울 시민들이 보지 마라꼬, 우리가 여기서 시위하는 걸 모르게 하려고 가리려는 거야. 나쁜 경찰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걸 무서워하거든.’

‘그게 경찰들한테 왜 필요한데?’

‘나쁜 경찰들은 사람들이 화내고 있다는 진실이 알려지는 걸 무서워 해.’

‘아빠가 ‘나쁜 경찰’이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그래... ‘나쁜 경찰’이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50여 미터 이상을 더 걸어가자 광화문 앞에 늘어선 이중의 경찰 차벽 바로 앞에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았고, 딸아이와 나도 그들 중에 끼어 깔개를 깔고 앉았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고, 밥 대신 과자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운 딸아이가 잦은 복통을 호소하는 탓에,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은커녕 화장실 구경만 수차례 시켜준 못난 아비와 어여쁜 딸아이는 시위가 잘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벽으로 쓰이는 경찰버스를 끊임없이 뒤흔들어 주는 시위대의 볼거리들 말고는 멈춰버린 시간같이 여겨졌을지도 모를 지루함에도 딸아이는 불평 없이 내 옆을 지켜주었다.

 

‘아빠, 아빠는 왜 같이 목소리를 안 내?’

경찰대열의 진두를 맡은 이가 확성마이크를 통해 시위대를 협박하거나, 경찰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면 시위대들은 곧잘 ‘우~~~’하는 함성을 소리모아 외쳤었다. 내 옆에는 언제 돌아왔는지 키 크고 과묵한 대구청년당원이 내 옆에서 양손을 입에 대고 시위대의 함성을 따라 목청껏 소리를 내어놓았다. 그는 이미 짙은 썬그라스와 검은색 가죽장갑을 벗은 때였다. 그 때에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니가 검도할 때 기합 소리 잘 안 내듯이 아빠도 그런 거 잘 못해.’

나는 수줍은 미소를 딸아이에게 지어 보였다.

 

‘근데, 사람들이 왜 ‘우~~~’하는 소리를 다 같이 내는 거야?’

‘저기서 마이크소리로 크게 들리는 경찰관이 다른 경찰관들을 지휘하는 걸 방해하거나, 저 경찰버스들 뒤에 갇힌 100여명의 시위대와 유가족들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해서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아... 맞나?!’

‘그래, 유가족분들이 시위대에게 당부를 했대.

시위가 절대로 폭력적으로 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대.’

‘여기 있는 우리나 다른 사람들, 아무도 폭력을 안 쓰잖아.’

‘그래도 경찰과 밀고 당기고를 하다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안 좋은 일들이 생길수도 있거든.’

‘경찰들이 물대포를 쏘거나, 최루액을 안 쓰면 되잖아.’

‘그래도 참아야지. 그래야 독박을 안 쓰지.’

‘독박이 뭐꼬?’

‘유가족분들이 아이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폭력 시위를 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는 말아야지.’

‘그기 독박이라 카는 기가?’

‘아... 뭐, 꼭 그럴 때만 쓰는 단어는 아닌데...

야, 대충 좀 알아 묵으면 안 되것나?’

‘카믄, 우리가 유가족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이게 다야?’

‘이건 중요한 거야.

예전에는 어떤 반대머리 아저씨가 대통령이 되려고 아이, 어른, 임신한 여자 할 것 없이 총을 쏘며 시위를 진압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빨갱이라는 이상꾸리한 단어를 쓰며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기도 했었거든.

지금 유가족분들은 그런 게 싫은 거야.

그래서 더디고 힘들더라도 폭력을 써서 나쁜 경찰들에게 자기들이 옳다는 핑계를 주지 않으려는 거야.

그러려면 너나 아빠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주는 게 매우 중요한 거야.

사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너와 아빠가 없어도 별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

하지만, 너와 내가 그렇게 ‘나 하나쯤 없어도 뭐...’하는 생각을 여기 모인 사람들이 너나없이 한다면 이런 사람들의 힘이 생길 수가 있겠나?

그렇게 되면 저기 경찰 차벽 뒤에 갇힌 유가족분들과 그들을 만나러 간 100여명의 사람들은 그만 포기하고 주저앉고 말끼다.’

‘카믄, 우리가 지금 억수로 중요한 일을 하는 거네?’

‘그래, 중요한기다.

그리고 그런 마움 가짐보다 더 중요한 거는 없는 기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는 말이다.’

‘카믄, 아빠 니도 같이 소리내가 ‘우~~~’해라.’

딸아이가 나에게 비수를 꽂는다.

 

‘안 해.’

‘카믄 나도 안 해.’

‘아빠는 니보고 같이 고함지르라고 한 적 없는데?’

그렇게 아비와 여식은 말을 섞고 나서 서로 한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대열에 합세해 같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딸아이가 나를 툭툭 쳤다. 나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빠, 니 목소리가 젤 크다.’

딸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어주었다.

‘니는 왜 안 해!’

‘아빠 니가 내 꺼까지 해라.’

‘에라이~ 자슥아.’

 

시간은 흘러흘러 어찌어찌 하다 보니 대열의 중앙에 있던 대구 사람들은 시위대의 바깥쪽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바로 옆에는 대구 통진당 출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통진당 출신들은 유가족들에게 누가 될까 여겨 시위대의 선봉에 절대 나서지 않았다. 시위대의 선봉이라면 NL출신들을 뒤따를 자가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궂은 자리에는 언제나 통진당이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받혀주던 원동력이었지만, 주사파 빨갱이 당이란 허울을 둘러 쓴 그들에게 더 이상의 손길을 바라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나서지 않았고, 그저 자리를 지켜주는 것에 머무르며 유가족들을 배려해 주었다.

 

저녁 9시 무렵 즈음에, 차벽 바깥에 자리 잡은 시위대는 언제 끝날지 모를 집회를 위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잠시 무료하던 차에 아이를 대구시당 사람들에게 맡기고 잠시 동안 뚫렸던 차벽 사이로 가 보았다. 대여섯 명의 전투경찰이 중무장을 하고는 방패를 앞세워 벌어진 경찰버스 사이를 메우고 있었고, 그들의 뒤에는 수십 명의 경찰이 바로 뒤에서 받히고 있었다. 그들이 선 자리 밑에는 치열했던 접전을 알려주는 어지러운 물품들이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너머에는 유가족들과 100여 명의 시위대가 어마어마한 경찰병력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며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파고들며 지나갔다.

 

 

‘깃발 줘 봐요.’

‘네?!’

‘깃발요.’

‘깃발은 뭐하시게요?’

‘줘 봐요.’

앉아서 깃발을 세우고 있던 이에게서 깃발을 받아들고는 낚싯대로 만들어진 깃대를 차례로 접었다.

‘나 좀 따라와 봐요.’

깃대를 건네받은 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형님, 어디 가시게요?’

 

영문도 모른 체 따라나선 이와 함께 경찰 차벽 앞에 섰다.

‘내 좀 무등 태워줘요.’

그가 경찰버스에 두 손을 짚고 쪼그리고 앉아 주었다.

‘아무래도 두 발로 어깨를 디디고 서야 키가 닿을 것 같아요.

그래도 되겠어요?’

‘아, 그럼요.’

신발을 벗을까 말까 주뼛거리자...

‘괜찮아요. 그냥 신발 신고 밟으세요.’

 

그가 힘겹게 두 발을 일으켜 세우자, 발을 버스 차창 가에 디딜 수가 있었다.

‘저기 손 좀 내밀어 주실래요?’

버스 위에는 알지 못하는 이가 렌즈가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고립된 100여명의 시위대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기요~’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카메라맨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버스지붕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예?’

‘손 좀 잡아 주세요.’

‘아, 네 네.’

카메라맨이 잡아 당겨주는 힘을 보태 힘겹게 경찰버스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깃발의 대를 차곡차곡 빼내어 깃대를 높이 세웠다.

 

그리고는 경찰병력에 둘러싸여 고립된 유가족들과 100여명의 시위대를 향해 힘차게 좌우로 깃발을 흔들어 제쳤다.

 

‘힘내세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힘내세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힘내세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커다란 깃발이 좌우로 힘차게 흔들리며 ‘파르륵, 파르륵~’거리는 소리를 요란히 내었다.

 

‘야, 경찰, 경찰, 우측에, 저기 버스 위에 깃발 잡아! 깃발 잡아!’

경찰을 진두지휘하던 확성 마이크에서 깃발을 흔드는 걸 제지하라는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아래에서는 백여 명의 대기 병력들이 캠코더와 카메라를 경찰버스 위로 치켜들고는, 깃발 흔드는 모습을 연신 후레쉬 터트리며 찍어댔다.

 

잠시 깃발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야! 찍어! 찍어! 채증 해! 채증 해!’

요란스런 그들을 잠시 동안 지그시 내려 보다가 깃대를 들고 여러 대가 이어져 있던 경찰버스 지붕 위를 내달렸다. 끝까지 다다르면 다시 돌아오고, 또 반대로 뛰고, 또 돌아오고 하며 큰 깃대를 세우고 신나게 뛰어 다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캠코더와 방패를 든 50여명의 경찰이 깃대를 따라 같이 뛰어 다녔다.

 

뜀박질을 멈추고는 낚시대로 만들어진 깃대를 차곡차곡 다시 접었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그시 쳐다보아 주었다.

 

깃대를 따라 힘차게 내달려 준 50여명의 경찰들을 배려한 포토타임이었다.

 

‘너, 완전히 찍혔어. 니 얼굴 정확하게 나왔어.’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지...

차라리 버스 위로 잡으러 와보던지 하지 않고서는...

 

‘발해야, 아빠 물 좀 줘’

헐떡이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왜 그랬어?’

‘뭐가?’

‘우스꽝스러웠어.’

‘그렇게 웃끼던?’

‘카믄, 안 웃끼나?

등을 뒤로 하고 허공에다가 깃대를 마무 흔들면서 뭐라 뭐라 웅얼거리지를 않나.

갑자기 깃발 들고 버스 위를 뛰어 다니지를 않나.

아... 챙피 해!’

 

‘인생이 원래 다~ 그런 거야, 임마...’

 

 

그로부터 한 시간여 뒤에 고립되었던 유가족과 시민들이 풀려나왔고, 우리는 유가족들의 마중을 받고는 대구로 가는 버스로 올라탔다.

 

대구로 달리는 전세버스 안에서 여식은 아비의 가는 허벅지를 베고 누워 곤히 잠들었다.

 

 

 

 

2015년 4월 18일 날,

하필 18일이라는 날에 새끼가 산채로 수장된 아이의 어미로부터 씹팔년이라는 쌍욕을 수천 명이 귀 기울이고 있던 군중 앞에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도중에...

한 아이의 아비는 이미 축축히 젖어버린 잔디 위에 고개를 떨구고 서러움에 복 받힌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나 그런 못난 아비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위로해 주던 딸아이에게...

더 이상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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