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난중일기> 2017년 3월6일 맑음
박영수 특별검사는 오늘 수사결과 대국민보고에서 ‘한정된 수사 기간과 주요 수사대상의 비협조 등으로 특검 수사는 절반에 그쳤다’고 말했다. 솔직하고 겸허한 평가다. 그래도 나는 박영수 특검에게 80점을 주고 싶다. 100점 만점에 80점이 아니라 80점 만점에 80점이다. 100점이 만점으로 될 수 없었던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협조와 황교안 권한대행의 특검연장 불승인 때문이다.
박영수 특검은 이제까지 출범한 12번의 특검 중 유일하게 ‘성공한 특검’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악의 특검은 2008년의 삼성특검이었다. 삼성특검은 수사 과정에서 4조5천억원의 차명재산을 발견한 뒤 이를 이건희 회장이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상속 받은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건희 회장을 구속하는 대신에 그의 재산을 4조5천억씩 불려준 셈이다. 그 후 이 사건 특별검사의 아들이 삼성전자 과장으로 특별 채용됨으로써 세간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불행한 것은 재벌3세이다. 이건희 회장이 2008년 특검에서 구속되었다면 정경유착의 3대 세습은 근절되었을 것이며 박영수 특검에 의해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박영수 특검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내가 17대 국회 법사위원으로 이른바 삼성X파일에 나오는 떡값검사 명단을 발표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대검 중수부장으로 부임한 상태였다. 다시 그를 만난 것은 2015년 6월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였다. 그는 황교안 후보자측 증인이었고 나는 야당측 증인이었다. 그는 25년간 같은 조직에서 동고동락한 3년 후배에 대해 증언하였고 나는 40년전 같은 학교를 졸업한 옛친구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는 황후보자가 총리적격이라 증언하였고 나는 부적격이라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16년 12월1일은 묘한 운명의 날이었다. 이날은 박영수 변호사가 박근혜 대통령등을 수사하는 특별검사에 임명된 날이다. 임명권자는 박근혜였고 임명장 맨 아래에는 대통령 박근혜라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이날 임명장을 박영수 특검에게 수여한 사람은 황교안 국무총리였다. 자신이 임명권자이면서도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 설 수 없었던 대통령 박근혜는 그 후 자신이 임명한 특별검사 앞에 피의자로 서야하는 자리에도 서지 않았다.
특검기간 내내 나는 박영수 특검과 생각을 같이 했다. 박근혜, 최순실게이트의 본질은 권력 사유화를 통한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이라는 특검의 진단, 청와대 압수수색과 특검 수사기간 연장에 대한 판단 등 모두 일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영수 특검은 대다수 국민의 생각과 같은 상식적인 판단을 한 것이고 나 역시 그 대열에 함께 한 결과이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도 생각난다. 그는 황교안 권한대행과 함께 사법연수원 동기이다. 둘 다 연수원13기 동기 중 대표적인 ‘강골 공안통’이다. 대검 공안부장, 공안과장을 각각 거쳤다. 그러나 이번 박근혜 탄핵재판에서 박한철 재판소장은 대다수 국민의 상식과 생각에 어긋나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사실 지난 몇 달간 이 나라엔 좌우, 보수진보, 여야가 없었다. 영호남도 없었고 남녀, 노소도 없었다. 상식과 비상식이 있었을 뿐이다. 특검출범도, 국회 탄핵소추의결도 모두 절대 다수 상식의 위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만나서 헤어지는 것은 세상사의 이치이다. 오늘은 작년 12월 1일 특검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이름을 함께 한 박영수, 박근혜, 황교안 세 사람이 헤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박영수 특검이 오늘 하직인사를 했고 며칠 후는 대통령 박근혜 그리고 늦어도 두 달 후엔 황교안 권한대행이다. 상식의 편에 섰든 비상식으로 일관하였든 결국 떠나게 된다. 그러나 다들 떠나도, 언젠가 촛불마저 꺼져도, 광장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박영수 특검이 남긴 것처럼, 수많은 촛불들이 남긴 상식이 광장을 가득 채우며 새 집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외칠 것이다. “이게 나라다!”
그날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