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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 ㅡ 한겨레 신문에서 퍼온 글입니다.
 

 

 
손아람
작가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의 화두는 불평등이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부유세를, 버니 샌더스는 상속세 강화를 해법으로 내밀었다.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19명의 갑부들은 부자 증세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고,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60%의 백만장자가 부유세 도입을 지지했다.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실리콘밸리 기업인들은 기술, 환경, 금융 등에 과세하여 매달 1000달러의 기본소득을 국민에게 지급하겠다는 앤드루 양을 지지하고 나섰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오히려 유권자들이 기본소득제도를 미심쩍어한다. 징후적인 현상이다.

 

‘사회는 시민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낼 때만 바뀐다’는 명제는 아름답게 들리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두드러진 역사의 변곡점은 시민의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불쑥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 분배 제도의 근간인 누진세의 개념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애덤 스미스가 처음으로 제시했고,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침략 전쟁을 수행할 재원 확보를 위해,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재원 확보를 위해 도입되었다. 미국의 상속세는 독립전쟁 재원 확보 수단으로 제안된 뒤 대프랑스 전쟁, 남북전쟁, 대스페인 전쟁, 제1차세계대전 등의 전쟁이 터질 때마다 폐지와 부과를 반복한 끝에 정착했다. 사회보장제도 역시 미국에서는 대공황에 대응하는 정부 정책으로, 유럽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체제를 방어하려는 보수 정부의 타협안으로 등장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첫출발부터 자본주의 수호를 위한 위장 전략이라는 비판에 둘러싸였다. 첫 단추를 어떻게 끼웠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타협점의 균열을 최대로 벌리고 사회정의의 언어로 확장해낸 것은 시민들의 몫이었다. 완고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면, 소득재분배 제도가 경제정의 실현 수단이 아닌 지배 체제의 유지를 위한 눈속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위기감이 커질수록 타협의 지렛대도 더 커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음 세대의 변화 역시 전통적인 운동 언어에 사회가 공명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소득 불평등과 구직난을 기본소득으로 해소하자”는 명확하게 주체적인 목소리는 그간 완강한 침묵의 저항에 직면해왔다. 국가가 세금고지서가 아닌 월급을 꼬박꼬박 국민에게 지급한다는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층부와 하층부의 생산력 격차가 너무 벌어져 체제 유지를 위한 경제의 선순환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앤드루 양의 지극히 자본주의적인(하지만 직관적인) 문제제기는 즉각 영향력을 발휘했다. 앤드루 양의 언어가 겨눈 과녁은 생산직 노동자들이지만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을 빠르게 설득하고 있다. 자신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달라고 호소했던 워런 버핏의 기고문, 불평등을 그대로 두면 곧 반란이 일어난다고 경고했던 벤처투자가 닉 하나워의 연설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이것은 시민혁명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매력 갱생을 위한 ‘당근’ 다이어트에 가까운 출발이다.

 

한국에서도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초과근무 금지 등 피부에 와닿는 변화에 비해 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증세, 기본소득제도 등 경제구조 개혁에는 많은 이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소수의 정치인과 이론가들이 담론을 주도한다. 체제의 사각지대를 줄여온 한국의 시민운동은, 변화는 힘이 닿는 곳에서만 일어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때 이르게 냉소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분수경제가 낙수정치의 힘을 빌려 태동하는 역설은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지만, 우리는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래가 가까워졌을 때 나타나는 조짐마저 내다보지 못한다. 누진세와 상속세, 사회보장제도의 역사적 첫 방문이 그런 모습일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오히려 새로운 제안들을 뜬금없는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단정하느냐, 거기서 사회정의의 언어를 발견하느냐가 시민사회의 역량에 따라 갈릴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1778.html?_fr=mt5#csidx03038386b858efd9dff968975c116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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