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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자 사민당 >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참여연대의 월간 참여사회 5월호에 인터뷰기사가 실려 옮겨봅니다

시민 참여, 시민 연대, 시민 감시, 시민 대안을 기치로 1994년 9월 10일 발족한 대한민국 최고의 시민단체 참

여연대는 단돈 10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지 않고 100% 시민의 후원금으로만 운영하고 있습니다. .

모든것을 좋게만 실어주시고 먼길 오셔서 취재해주신 박현아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박형민 회원

 

 

호모아줌마데스 애엄마

사진 송윤정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해 책상에는 과일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 눈은 과일 접시 밑의 세상에 가 닿는다. 책상 위에는 그의 삶터가 ‘전라북도 전도’라는 이름을 달고 작게 축소되어 접시를 떠받치고 있다. 그 한 장의 지도로 인해 뚜렷해지는 나의 좌표. 그렇다, 여기는 광주다. 그러나 지도를 아무리 노려봐도 실감은 잘 나지 않는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생애 처음으로 떠난 출장과 한 번도 디뎌보지 못한 남도의 땅을 밟는 소회 사이에 잠시 머물러 있는데, 느닷없이 그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 나 아직 질문 안 했는데? 그의 이야기보다 한발 늦게 켜진 녹음기에 녹음 중임을 알리는 램프의 붉은 빛이 들어온다. 순간, 내 머릿속을 떠다니던 단어들의 예사롭지 않은 조합. 이곳은 광주이고, 인터뷰이가 사는 곳은 농성동이며, 돌아갈 때 탈 서울행 기차의 차량 번호는 518호였다. 

 

 

씨앗 하나 :  진보와 정의라는 이름의 민주주의

 

첫 질문을 건넨 시점은 대화를 시작한 때로부터 5분이 훌쩍 지나서였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박형민 회원은 낯선 이를 앞에 두고 자신의 인생을 요약해내고 있었다. 1996년 가을, 전남 보성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전국을 떠돌다 다시 고향 언저리로 돌아왔다. 그곳이 바로 광주였기에 스치듯 물었다, 5·18에 대한 기억이 있느냐고.

 

“그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제겐 직접적인 기억은 없어요.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비들이 광주에 나타났다고 전해 들었었죠. 어른이 되어 진실을 알게 된 후론 저도 어쩔 수 없이 부채의식이 생기더군요.”

 

누군가에겐 역사가 되어 기록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흉터처럼 남고, 때론 생생한 현실이 된다. 남도의 너른 들판을 덮고 있는 그 흉터가 그의 삶에 남긴 자국은 역사적 소명의식이라는 무거운 단어로 응축되어 있었다.

 

“사회의식에 눈을 뜬 후 제 정체성은 사회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에게도 향약과 두레라는 공동체적 모습이 있었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극과 극으로 치닫는 사회는 아니었던 거죠. 연대가 가능한 사회적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혁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할 텐데, 그중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조합이나 의회정치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에요.”

 

혁명이 도래하면 분연히 일어나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그가 사회민주주의를 꿈꾸는 이유는 이렇다.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었습니다. 이제 지하정당에 머물 것이 아니라 대중정당으로 나서라는 대중의 뜻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국민의 명령을 과거 운동권 세력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통합진보당 사태도 그런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구요. 고민이 깊었죠. 이 난관을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저에게는 그 답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였습니다.”

 

그는 현재 진보정의당 당원이다. 그 전에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다. 진보정당 운동을 꾸준히 해왔던 그가 진보의 비전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사회민주주의다. 

 

“물론 경계할 것들도 있어요. 서유럽 사민주의는 지나친 의회주의에 경도된 면도 있고 자본과의 비판 없는 결탁으로 인해 신자유주의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 식의 ‘사회적 경제’ 보다는 노동과 복지 중심의 스웨덴식이 더 적합할 것으로 봐요.”

 

지역의 당원들과 사민주의 공부 모임도 활발히 갖고 있는 그다. 앞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그 황량한 벌판에 그가 씨앗 하나를 들고 서 있다. 

 

 

씨앗 둘 : 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이웃들 곁으로

 

그는 작년 가을에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그 병명 하나로도 버거운데 혈소판증가증이라는 낯선 이름의 병마저 그의 몫이란다. 

 

“혈액암의 일종이에요. 뇌종양 수술을 준비하는 도중에 발견되었는데, 이 병으로 당장 생명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치료법도 없는 상황이죠.”

 

다행히 뇌종양 수술은 잘 마무리 되었고 혈소판증가증도 약을 먹으며 관리하고 있다. 처음의 혼란함에서 많이 벗어난 지금,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하다. 예후가 좋다는 말에 안도하고 있을 때 인터뷰 내내 곁을 지키던 그의 아내가 불쑥 목청을 높였다.

 

“이 사람이 수술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 처음 내뱉은 말이 뭔지 아세요? ‘하수관거’였어요.”

 

하수관거(下水管渠)? 사자성어인가? 무식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내 앞에 그가 신문 스크랩 뭉치를 꺼내 놓는다. 

 

“이 지역은 구도심이라 빗물과 오수가 따로 분리되지 않고 그냥 하천으로 빠지게 되어있어요.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하수관거 공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취지는 좋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그런 공사를 시작하면서 주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공청회도 안 하고 심지어 환경 조사도 없었어요. 그래서 공사가 시작된 이후 동네 여기저기에서 담이 무너지고 벽에 금이 가고 그 틈새로 물이 새고 전봇대가 기울어지는 일들이 발생했어요.”

 

당황한 주민들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이웃 주민들 모두가 그저 평범한 생활인으로만 살아와서 시청과 대기업에 맞설만한 조직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죠. 그래도 저는 조금이나마 경험이 있었고요.”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그 책임을 지는데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싸웠다. 그러다 덜컥,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내가 없더라도 끝까지 싸워 건설자본의 횡포를 막아라", 이게 그가 수술을 앞두고 나간 하수관거 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한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한참 그런 일들을 벌여놓고 있던 중에 병원에 들어가게 돼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그래서 그 말이 맨 먼저 튀어나왔나 봐요.”라며 그가 겸연쩍게 웃는다.

 

어쩌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길을 나서며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들은 아내와 어린 자식 셋,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 후원을 하고 있는 보육원의 버려진 아이들 그리고 이 땅의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을 등 뒤에 남겨두고 그 길을 어찌 갔을까. 지금 그의 행복은 이들 모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이 다시 주어졌다는 것, 오로지 그것 뿐이다. 

 

 

씨앗 셋 : 가난이라는 씨앗을 심고

 

참여사회 2013년 5월호 (통권 198호) <만남>

 

그가 내뱉는 무겁고 거친 단어들에만 휩쓸리면 자칫 그를 잘못 읽어낼 수도 있다. 그가 사용하는 많은 관념어들을 거두어내면 그 밑에는 온통 무른 것들 투성이다. 

 

“20년간 일을 하면서 옮겨 다닌 직장만 17군데입니다. 예전에 성남에서 지낼 때 버스 운전을 했었어요. 없는 사람들끼리 뭉치다보니 노조 활동도 하게 되고 노동법 등 관련된 공부도 하고 그렇게 세상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나갔죠.”

 

당시 성남엔 빈민들이 많았다. 대부분 육체노동자들이었고 하루하루 몸을 부딪쳐 연명하는 삶은 가난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사회민주주의, 건설 자본, 투쟁, 혁명 등의 거친 언어들은 그와 그의 가난한 이웃들의 헐벗은 삶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학창시절 내내 공부를 곧잘 했어요. 그러고도 원하는 공부를 위해 대학을 가지 못한 것 또한 내 부모가 가난해서였고……. 어렸을 땐 밭에서 일하다가, 시장에 오이를  팔러 나왔다가 흙이 잔뜩 묻은 차림새로 학교에 들르시곤 하던 어머니가 부끄럽기만 했어요.”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제 부모를 부끄러워했던 마음이 되레 부끄러워질 무렵, 그는 세상을 보듬고 싶어졌다. 점심시간이면 까먹을 도시락이 없었고 새 옷이라곤 군 제대 후 받은 잠바 하나가 전부였던 기억 속에서 그는 늘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생을 놓고 고민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세상엔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저희 집 막내는 입양했어요. 젊은 시절부터 보육원에 활동을 다니며 입양을 꿈꾸었는데 그걸 이루기는 쉽지 않았죠. 아이가 저희 집으로 오던 날 이젠 무겁고 답답했던 마음이 좀 가벼워지겠지 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지금도 영애원이라는 보육원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는데,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네요.”

 

참여연대 고리가 매달린 휴대전화로 한쪽에서 통화 중인 그의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팍팍했던 그의 인생에서 그의 아내는 봄비였을까. 씨앗을 준비하는 농부의 어깨를 조용히 적시며 겨우내 얼음에 갇힌 땅을 깨우는 온기였을까.

 

광주의 한 허름한 골목에 봄비가 내리고 있다. 그 골목에서 그는 ‘모든 씨앗’이란 간판을 걸고 씨앗을 파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건강치 못한 몸으로 세상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선한 눈매의 아내는 오늘도 그 따스함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그늘진 자리를 보살피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가 가슴으로 세 아이를 안는다.  

 

 

그러고도 지속되는 것들

 

참여연대에 가입한 이유 또한 세상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다. 적은 돈이지만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면죄부가 되길 기대했다는 그에게 참여연대에 바라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저 미안하다”였다.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해 미안하기만 한 그 마음을 세세히 헤아리자면 분명 내 가슴까지 아려올 것이기에 나는 그저 그의 배웅을 받으며 묵묵히 돌아섰다. 

 

무거운 이야기들을 싣고 서울로 돌아오며 어떻게 하면 재밌게 쓸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한없는 존재의 가벼움 앞에 앙금처럼 밑으로 가라앉는 생의 무거움을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은연 중에 이제 혁명은 어렵게 된 것 아니냐고 말했던 그. 하지만 혁명이 어려워진 이 세상은 여전히 균형추가 맞지 않고 더 많은 이들이 누려야 할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 애당초 도달점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들 각자 자기만의 혁명을 내걸고 싸우는 삶은 여전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꿀 그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원글보기 - 월간 참여사회 5월호 ) http://www.peoplepower21.org/Magazine/102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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