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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공감 5호] 지역의 재구성 - 마을은 무엇인가

마을은 무엇인가?

 

강주영 기획위원장

 

권력을 통해서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정의당에 입당한 것은 좋은 세상을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더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권력 장악을 통한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레닌주의도 버렸다. 역사발전단계설이라는 사적유물론의 명제도 마땅치 않다.

국가 없는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야말로 사람 사는 마을이었지 않았을까?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아메라카 인디언사회를 아나키민주사회라고 한다. 우리의 옛 마을이 그랬다. 함께 굶고 먹고, 아프면 온 마을이 걱정하고, 마을에서 아이를 함께 교육하고, 돌보며, 마을의 죄 지은 이를 멍석말이에서처럼 마을에서 벌주었다. 국가사회와 다른 마을 자치생활이 있었다. 국가체제사회와 마을자치사회의 이중체제였다. 노동과 주거와 일상이 한 공간에서 있었다. 발전은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옛날에 있기도 하다. 가난을 칭송하는 것은 아니다. 마을의 원리를 보자는 뜻이다.

마을은 사라지고 자본주의와 국가체제의 단위로 존재하는 공장, 사무실, 점포, 주거하숙촌으로 달려온 것은 진보가 아니라 후퇴이다. 오늘날은 마을 자치생활이 전혀 없다. 자치는 자유와 다르다. 자유가 사적소유에 기반한 개인 욕망의 자유라면, 자치는 지구와 다른 사람들 즉 만인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모시고 혹은 스스로를 다스리는 삶이다. 타인과 지구를 약탈하지 않는 삶이다.

비판해마지 않는 봉건제에도 충성의 댓가로 보호라는 유기적 원리가 있었다. 오늘의 자본과 노동의 신분제 사회에서 대기업 노동자 평균 근무년수는 11년에 불과하다. 기업은 충성의 댓가로 노동을 보호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는 일회용품이다.

부란 결국 지구 자원의 약탈이자 노동 생산의 독점이다. 농민을 쁘띠부르주아지로 취급하고 소농의 땅까지 몰수하는 농민의 희생에 기반하는 도시화와 공업화로 달려온 국가사회주의란 결국 지구와 노동약탈 사회에 불과하다. 빈부격차가 없는 평등사회가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동이 대약진운동, 천리마운동에 내몰리는, 결국 지구와 노동력 약탈의 산물이라면 그런 평등은 거부한다. 그것은 진보도 뭣도 아니다.

그럼 평등이란 무엇인가? 국가에 속해 지구와 타인의 노동을 수탈하는 붕어빵 찍어내기가 평등이 아니다. 평등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유가 아닌 자치의 삶이요, 국가의 통치에 대칭한 자치의 삶이다. 자치의 삶은 타인과 지구를 약탈하지 않기에 상호부조하고 협동하는 삶이다. 상호부조하고 협동하는 삶에서 부가 독점적으로 소유될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결코 자치의 삶을 이룰 수 없다. 자본주의도 국가사회주의도 아닌 것을 필자는 자치사회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자치사회주의의 실현 단위로서 마을에 주목해 본다.

도시에 마을이 있는가? 있다면 마을은 무엇인가? ‘마을 만들기’는 무엇인가? 마을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마을 공동체’는 또 무엇인가? '마을 공화국’이라는 말도 있다. 공화는 또 무엇인가? 마을을 만든다면 정의당, 민중당, 녹색당, 민주당, 민주평화당, 바른마래당, 자유한국당들의 정치는 마을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국가가 있는데 마을공화국이라니? 공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마을과 공장은 어떻게 되는가? 마을공화국이라면 그 마을에는 무산자, 유산자 하는 계급이 없는가? 마을공화국 운동은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것인가? 마을공화와 국은 서로 형용모순 아닌가? 공장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일하고 마을에 돌아오면 그는 마을민인가? 마을의 하숙생인가? 마을에 먹고 사는 것이 없는데 마을공화국이 되는가? 마을은 국가의 축소판인가? 도시 마을이라는 말이 가능한가? 도시 마을은 하숙촌이지 않은가? 하숙촌이 생활공동체, 노동공동체가 되는 게 가능한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때로 이런 질문이 필요한가도 의심이 된다. 마을에 먹고 살 것이 있어야 마을 만들기든 마을공화정이든 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마을 만들기는, 혹은 마을 공화정은 마을이라는 생산체(?)가 시장에 진입하여 경쟁하는 시장 단위인가? 아니다면 국가 단위의 시장과 독립된 마을 생산체가 가능한가? 마을은 기업과 경쟁하는 관계인가? 공장, 사무실, 가게와 경쟁하라는 것인가? 마을 공화국은 대한민주공화국의 정치 주체로서 결국 마을과 마을의 연합으로서 국가를 이루자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운동인가? 여기서 이 질문에 답하지는 않겠다. 함께 궁리할 문제이다.

개혁이든, 혁명이든, 문명 전환이든 그것들의 주체는 결국 사람일 텐데, 사람들의 단위는 공장, 사무실인가? 마을인가? 마을은 노동 해방을 할 수 있는가? 노동 해방은 무엇인가? 노동 해방은 일을 안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노동 해방은 부불노동-잉여가치의 수탈을 없애는 것뿐 아니라 나의 자아와 노동이 일치하고 타인과 지구를 약탈하지 않는 노동이다.

마을의 코흘리개와 애기 엄마와 종이 상자 수레를 끄는 노파들에게도 마을이 기능해야만이 마을이라 할 것이다. 공공(公共)한 삶이 마을 자체로 가능해야 마을 공화정이라 할수 있지 않을까?

그 본질이 폭력일 뿐인 국가가 대안이 아니라면 마을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폭력체인 국가권력을 잡으려는 정의당을 지지하는 것은 정의당이 국가권력을 약화시키고 마을권력, 공장권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마르크스의 근본 명제 중의 하나인 국가소멸론을 미약하나마 실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마을이 없다면 국가소멸론과 자치평등을 어떻게 이루겠는가?

마을을 공장으로 만들 수도 없다. 공장과 사무실을 마을로 만들 수도 없다. 과연 그런가? 생각을 개벽해 보자.

마을에 공해 없는 공장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 3D출력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기반 기술들이 마을과 공장의 경계룰 허물 것이다. 포디즘을 대체하는 유연 분산화 전략이 가능하다. 공장의 유목화도 실현된다. 인공지능 체제에서 팀 단위의 마을 단위 재택근무 체제도 확대될 전망이다. 도청의 모든 실국을 한 공간에 몰아넣는 포디즘적 사무 체계는 권위주의와 20세기형 노동 체제이다. 21세기 중반 노동 체제는 80년대 초에 지금의 인터넷 세상은 생각도 못했던 것과도 같은 변화를 가질 것이다. 첨단화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다지털기술에 기반한 수공업도 새로운 경쟁력으로 귀환할 것이다. 유명 브랜드 공장제 가방보다도 동네 명장의 수공업 가방이 더 주목받는 윤리적 소비도 확대되고 있다. 20세기 마을과 공장이 분리되었다면 21세기는 마을과 공장이 다시 융합되고 있다.

민주와 자치가 진전될수록 직업공무원제도 좁아진다. 서기, 주사, 사무관, 서기관하는 직급도 고시제도도 사라져야 한다. 미국은 간부를 대개가 공모한다. 어제까지 실무자였다가 오늘은 과장이었다가 내일은 다시 실무자로 간다. 위계적 관료주의가 발을 붙일 수가 없다. 그뿐 아니다. 재무관, 감사관도 선거로 뽑는 곳이 많다. 만주화될수록 노동이 변한다. 노동은 더욱 유연해진다. 불행히도 노동유연화는 피할 수 없다. 개개 사업장에서의 노동보호보다도 사회안전망이 필요한 이유이다. 사회안정망의 일차 진지는 마을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19세기형 노동가치관, 20세기형 산업관, 생산력 발전에 기댄 지구약탈적 사회진화 시각만 여전한 사람들 , 21세기의 전망은 없는 구체제의 정치! 민주가 훈장이 아닌 낙인이 된 사람들, 그 자신들이 이미 고물이 된 낡은 진보들 !

마을과 공장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남녀노소가 한 방에 있는 찜질방 문화는 아마도 한국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이 촛불을 켜지 않았을까? 개벽마을이 가능한 것은 자본에 의해 공장과 마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어서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적폐부터 없애야 한다. '사회진화'라는 다윈주의로서의 진보를 해체하고 평등과 노동의 개념을 마을과 공장의 개념을 다시 세워야 한다. 진보주의와 함께 국가의 강역으로 사고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노동계급우선주의를 필자는 개벽하고 싶다. 헛세계화이든 진세계화이든 이미 세계화가 된 시대에 천하체계를 다시 고심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유, 민주, 평등을 개벽해야 한다. 혁명을 개벽해야 한다. 고장난 근대를 만든 합리적 이성을 개벽해야 한다. 서구의 합리적 이성에는 진보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영성에는 개벽이 있다.

마을이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 천하의 마을과 교류해야 한다. 마을의 영역과 인구는 행정 단위에 구속되지 않는다. 동유럽의 에스토니아는 디지털국적제도를 하고 있다. 전주시민 65만 명을 200만 명의 천하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우리 하기 나름이다. 크고 많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발상을 개벽하자는 것이다. 마을의 전망은 공장과 천하의 전망과 같다.

개벽 담론이, 개벽마을이 일어나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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