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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공감 4호] 지역의 재구성 - 지역형 일자리와 좋은 삶

지역형 일자리와 좋은 삶
 

강주영 기획위원장

 

일자리인가? 좋은 삶인가? 일을 왜 하는가? 대부분 돈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삶의 자아 실현을 위해서라고 답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삶의 자아와 일자리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노동해방은 삶의 자아와 노동이 일치하고, 부불노동 즉 잉여가치의 수탈이 없는 상태이다. 노동해방은 곧 자치자급하는 삶이다. 자치자급은 홀로이 산, 바다, 들에서 농립어업을 하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노동을 결정하고 운영하는 삶이다. 노동해방과 같은 말이다.

 

필자는 노동해방의 조건으로 5 가지를 든다. 첫째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자아와 일치하며, 둘째 타인의 노동을 수탈하지 않고, 셋째 타인과 상호부조 연대하며, 넷째 지구를 약탈하지 않는 노동이며, 다섯째 먹고 ? 입고 ? 자고 ? 즐길 수 있는 기본적 여건이 마련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노동투쟁 현장에서 말해지는 노동해방이 이런 뜻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니까 좋은 삶이란 노동해방이 된, 다른 말로 자치자급하는 노동이다. 얼마전 보도에서 대기업 노동자(사무직 포함) 평균연봉이 1억이 넘고 근무년수는 평균 11년 정도라는 보도를 보았다. 초임이 4천만 원 정도라고 본다면 임금이 높은 대기업 노동자라고 하여 삶의 만족도를 느끼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임금이 열악한 노동은 어떠하겠는가? 물론 임금이 적어도 행복한 노동이라고 여기는 노동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욕망을 포기해서일 것이다.

 

필자는 한때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노동해방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 국가, 법인, 개인을 계급성을 가진 프롤레타리아로 역전시켰다. 참으로 ‘멋진 신세계’였다. 동학의 문법으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부르주아지혁명에서 ‘다시개벽’이었다. 그런데 역사상의 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자아는 당과 국가에 장악되었다. 혁명에 종속되었다. 만인이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대약진운동, 천리마운동에서 보는 것처럼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생산력 진화로 노동자들을 내몰았다. 자리바꿈만 있었을 뿐 변한 게 없다. 프롤레타리아 국가 역시 횡포한 개인으로서의 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소수의 부르주아지가 타도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잡았으니 ‘멋진 신세계’, ‘다시개벽’이 되었을까? 오히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는 마르크스 자신의 말대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되지 않았다. 역사상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는 당과 국가의 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개인인 붕어빵이 되고 말았다.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은 노동해방- 좋은 삶을 최종 국면에서 얻는 게 아니라 모든 과정과 단계마다 존재해야 한다. 즉 생산력이 낮아도 노동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 인류의 물자는 전 지구촌이 노동해방을 해도 충분하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예기 예운 편의 대동사회를 견주어보자.

그는 사냥꾼, 어부, 목동이거나 비판적인 비평가이다. 생활수단을 잃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는 그래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분야에서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한다. 그래서 사회는, 내가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내가 사냥꾼, 어부, 목동, 또는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단지 마음 가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게 된다. - 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대동).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민주 평등),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공동체). 나이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여지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복지).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공유제).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평화). - 예기 예운편, 기세춘 역-


유토피아가 다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생산력이 넘쳐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예기의 예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이 아닌 관계 속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 역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관계를 말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이미 대동에서 훨씬 더 구체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아닌 공동체에서 평등을 담지하는 자율과 자치였다. 생활의 협동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서구의 (사회주의까지를 포함한) 합리주의를 ‘권력의지의 표상’, 개인이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권력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고 하였다. 푸코는 좌우파 모두 '근대적 인간', '근대적 개인'은 생산되고 주조하고 세뇌된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어리석은 독재자는 국민들을 쇠사슬로 묶어두지만, 현명한 정치가는 녹도 슬지 않으며, 감시원도 필요 없는 관념의 사슬로 인민들을 엮는다. 한번 길들여진 부드러운 뇌세포는 영원한 제국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다."고 한다. 아울러서 푸코는 서구 좌우파의 “정치학과 정치사상은 아직까지 왕의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으로 푸코는 1979년 이란혁명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병한은 이렇게 적었다.

좌/우 및 종교의 극단을 배제한 80%의 일반 의지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사회계약과 역사계약을 견인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니요, 좌/우 근본주의도 아닌 성/속 합작의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며 독보적인 체제를 일구게 된다. 푸코는 테헤란에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과는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혁명적 혁명’을 목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좌/우 혁명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창조적 혁명', 진정한 '문화대혁명'이었다. 나는 불길처럼 뜨거운 그의 문장에 녹색 밑줄을 치고, '계몽 이후의 개벽'이라고 말을 보태었다. - 이병한, 유라시아견문, 「누가 촛불을 낚아채는가?」, 프레시안, 2017.6.17 -

서구식 민주주의나 서구식 노동민주주의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이병한의 이런 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사회주의혁명’과 “계몽 이후의 개벽‘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무엇이 노동해방이고 어떤 체제에서 노동해방이 가능한지를 보기 위해서 인용했다.

노동해방이 된 삶이 좋은 삶이라고 보았다. 그 조건을 다섯 가지로 말하였다. 마르크스의 문장과 예기의 문장으로 노동해방의 구체적 모습을 살펴보았다. 대기업 노동자로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노동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이 비정규직의 노동을 수탈하는 것이라면, 지구에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자신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타인과 지구를 불행하게 하기에 그의 행복은 이기적인 행복이지 결코 노동해방의 좋은 삶은 아니다.

필자는 노동자와 자본이 연대하여 지구를 약탈하고 있다고 본다. 일부 노동자들은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대해 관심이 없고 자신의 처지 개선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노동자이지만 노동해방가는 아니다. 노동투쟁이 노동조건 투쟁인지 노동해방 투쟁인지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고양이가 호랑이가 되지는 않는다. 노동투쟁이 노동해방투쟁이 되는 삶이 현재로서는 좋은 삶이다.


광주형 일자리, 군산형 일자리를 말하는 데 이 논의는 참으로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이다. 고용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목을 메는 산업예비군 즉 실업자들도 있다. 물론 삶의 그 절박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임금이 낮아지고, 노동조합 활동을 규제하고, 대기업이 생산 물량을 주는 광주형 일자리는 결국 지속가능하지 않다. 자본 입장에서 노동 규제가 훨씬 쉽고 임금도 낮은 해외로 갈 공장을 수지타산을 셈해 본 결과 괜찮다 싶은 것이다. 지역형 일자리를 상생형 일자리라고 포장하기도 한다. 상생형이란 노동해방으로 가는 과정의 씨앗이 있을 때 상생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일자리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좋은 삶의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좋은 삶, 좋은 일자리는 결국 노동운동의 방향에 달려 있다.

첫째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사회연대임금제를 쟁취하는 것이다. 이 구호는 노동운동가들의 수사로만 있지 실제 그런 노동운동은 한국에 없다.

둘째는 스스로 연합노동공제기금을 만들어 열악한 노동자 지원과 복지, 그리고 주식 매입을 통해 경영에 참가하는 것이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고용보험 재설계를 통해 연합노동공제기금을 만드는 것은 아직은 꿈이다. 교원공제기금과 행정공제기금은 있는데 왜 노동공제기금은 없을까? 노동자들은 홰 그 흔한 (노동)신용협동조합을 못 만들까?

셋째는 노동공제기금으로 특정 기업을 전 노동자 이름으로 매입하여 노동자자주관리공장의 모범을 세우는 투쟁이 필요하다. 전복과 탈취도 있지만 스스로 대안을 만드는 모범 투쟁이 필요하다. 군산 GM을 (부채를 안고) 천억에 인수한다는 보도를 들었다. 지자체와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노동자들은 천억을 못 만드는가? 왜 그런 발상을 못 하는가?

넷째는 정부의 재정운영에 대한 비판과 감시 투쟁을 일상화해야 한다. 현 정부 도시재생사업비 50조 원이 누구의 배를 불리는가? 35,009개 읍면동으로 나누면 한 동마다 142억이 갈 수 있다. 이 재정으로 35,009개의 마을주민의 공동자산인 마을작업장을 세울 수 있다.(지난 호 참조) 노동과 상관없는 재정은 없다. 전후방으로 1 마을 작업장마다 20명을 고용한다면 전국적으로 7만명이다. 당장 임금은 낮을지 몰라도 주민총유자산, 공동자산이기에 노동해방에 근접해진다.

다섯째는 환경 파괴적인 생산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한 친환경 생산 투쟁을 해야 한다. 노동이 자본과 지구 약탈의 공동정범이 될 수는 없다.

여섯째는 대형노조나 중소노조연합체에서 지역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즉 로컬푸드 매장을 공단이나 공장 내부에 들여오는 노농연대를 해야 한다. 생산과 소비의 연대로서 자본 주도 시장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위의 6가지 방향은 결국 지금 있는 부의 총량을 키우는 것이 아닌 있는 것의 새로운 분배와 새로운 운영에 관한 것이다. 좋은 일자리, 좋은 삶은 노동운동의 새길에 있다. 인류의 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성장률에 얽매일 이유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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