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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공감 3호] 지역의 재구성 - 공유지와 도시 마을의 "항산항심체 마을작업장"
공유지와 도시 마을의
"항산항심체 마을작업장" 

 
강주영 기획위원장
 
 
지난 호 글에서 마을 공유지를 말했다. 마을공유지 제안에 대해 이번 호에서는 종합적으로 정리해보았다. 
 
도시 마을 공유지에 주민 총유자산으로 마을작업장(초소형 공장, micro factory, 공장이 주는 어감을 피하기 위해 마을작업장으로 쓴다)을 만들자. 마을 작업장은 자치자급소농두레체(연합)의 도시 마을형이다. 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첨단이지만 초소형 공장(micro factory)이 마을에 들어설 수 있다. 집중집적된 거대 산업단지에서 유연분산화된 마을으로의 귀환이다. 관념에 고정된 대형 조립화 라인, 포디이즘을 보리자. 일터가 마을에 생긴다면 이산가족이 될 필요가 없다. 가족공동체가 부활할 뿐 아니라 마을공동체가 부활한다. 공동체가 부활하면 보육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을작업장은 주주의 것이 아닌 마을 주민의 총유자산이기에 마을에서 삶의 모든 것이 순환한다. 장거리 출퇴근도 사라진다. 
 

미국의 로컬모터스는 동네 카센터 규모에서 3D출력기와 부품으로 자동차를 조립 생산한다. 이 로컬모터스는 한국에도 진출을 시도한다고 한다. 디자인은 전 세계의 인터넷 유저들과 공동으로 한다. 개벽적이다. 과거의 수공업장에 첨단 기술과 네트워크가 결합된 것이다. 3D 출력기로 차체를 만들고 부품은 기존 자동차 회사에서 사와 만드는 마을작업장이다. 로컬모터스는 상품을 만드는 공장이지만, 우리는 이 개념을 마을의 생필품을 자급하는 마을 작업장으로 생각해보자. 기술의 민중적 소유이다. 

전주에 이런 마이크로 팩토리(micro factory)를 이 마을, 저 마을 한 100개쯤 만들면 어떨까? 문재인 정부 도시 재생 사업비 50조 원을 전국 3,509개를 만들면 어떨까? 필자는 개벽이라고 생각한다. 3,509개의 마을작업장에서 직접 10명을 고용한다면 전국에서 35,090명이 고용된다. 연관 유발 효과는 더 클 것이다. 투자 10억당 몇 명하는 산업 연관에 의한 고용유발계수로 전산업평균 15명을 적용하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70억이면(설비투자를 70억, 건물비를 72억으로 본다면) 95명이다. 도시 마을 한 곳을 활성화시키기 충분하다. 전국적으로는 약 33만명이다. 

동학의 유무상자 정신이다. 이 마을작업장은 마을의 총유자산이기에 마을에서 윤리적으로 소비될 수 있다. 마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윤리적 소비망을 건설할 수 있다. 대기업과 경쟁이 되겠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마을작업장은 대기업이 가져간 마을경제를 탈환해오는 것이자, 마을의 순환경제이다. 일방적으로 대기업에 뺏기든 부를 국가의 조세나 복지 정책이 아닌 스스로 탈환하고 재분배하는 일이다. 가구, 소금, 된장, 침구류, 자동차, 드론, 컴퓨터, 교구, 학교급식, 의복, 신발 등 대기업이 하는 모든 품목이 가능하다. 공장의 가구가 아닌 마을 목수의 가구, 공장의 구두가 아닌 마을의 수제화, 공장의 식품이 아닌 마을의 손맛으로 만드는 식품...... 로컬모터스 예처럼 자동차나 드론다 가능하다. 부품은 외지의 기업들이 생산한 것을 사오면 된다. 자치자급 가능한 물품은 마을작업장만 만들어지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협, 도농직거래, 공정무역, 공정여행 등 윤리적 소비가 확대되는 경향이 바탕이 된다. 

마을 총유자산으로서의 도시 마을 두레인 마을작업장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자연적으로 마을민회가 활성화될 수 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마을민회를 하자고 하면 어렵다. 하지만 눈앞의 생산과 분배를 두고 마을민회를 하자고 하면 쉬울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전통마을의 대동계나 촌계가 현대적으로 다시 개벽되는 것이다. 투표가 아닌 마을을 직접 운영하는 민주주의가 된다. 세상의 마을들과 연대한다. 인터넷을 통한 교역망과 설계 기능 결합은 곧 마을이 세계와 연결되는 일이다. 이제 마을이 세계를 품는다. 어디까지나 이윤이 아니라 사용가치의 교역이다. 간디의 스와라지 스와데시 자치자급하는 상호의존적인 완전한 마을공화국이 실현되는 계기가 된다. 거대산단이 아니라 마을작업장이 미래이다. 

마을작업장은 모시고 나누는 개벽경제의 시작이다. 마을작업장을 매개로 하여 다른 경제들도 활성화된다. 소비만 하는 마을이 아니라 생산이 있는 마을이라서 소매자영업도 활성화될 계기를 가진다. 

크로포트킨을 인용하면서 한 하승우의 견해를 들어보자. 

크로프트킨은 《전원, 공장 작업장》(형설출판사, 1983년)에서 경제학이 어떻게 이윤을 늘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그 물음에 "농업이 공업을 성립시키고, 공업이 농업을 지지"하는 통합된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땅과 인간의 다양성에 발맞춰 공업은 분산되어야 하고 "재배하고, 생산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곡식이 재배되고 공업제품이 만들어지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크로포트킨은 인류의 진보가 자급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크로포트킨은 소공업과 공업촌락이 "토지경작자가 동시에 공장노동자이기도 했던 옛 제도의 장점"을 살린다면 전체 인류가 넉넉히 살림살이를 장만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특히 농업과 결합해 노동자가 땅을 경작하는 가운데 발전하는 소공업은 작은 규모의 다양한 발명을 통해 농업의 발전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공업과 촌락은 서로를 필요려 하고 지지하며 발전한다. 크로포트킨은 소공업과 농업이 결합된 전원도시 또는 농촌과 도시의 유기적인 결합이 미래의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은 당시 소농과 지방 소공업의 몰락을 경제발전에 뒤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몰락을 당연시했던 자본주의 경제학자와 사회주의자 모두를 비판했다. 그리고 토지와 공장으로의 집중, 도시로의 집중이 반드시 사회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 하승우 「협동조합운동과 대안경제로의 전망」

이제 도시 마을 작업장 노동공동체와 농촌의 노동공동체 소농두레가 연대하면 된다. 상호부조하는 연대이다. 윤리적 영성으로 연대한다. 마을민회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이천식천 유무상자하는 연대이다. 마을마다 특성이 다르다. 단순히 일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고 스스로 자치자급하는 좋은 삶이다. 자치자급이란 홀로 농사를 지어 사는 삶이 아니라 타인을 수탈하지 않는 상호부조하는 삶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할 권리'가 아니라 모두가 '좋은 사람을 살 권리'이다. 
'일할 권리'는 언제나 임금노예가 되고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 고작 큰 공장 하나 더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떠난다. 지역총소득 4만달러 대한민국 1위(전북은 1만5천달러)로 부러움을 산 울산, 거제는 지금 미국의 디트로이트처럼 쇠락하고 있다. 이름하여 '녹슨 지대(러스트 벨트rust belt라고 저널은 영어 그대로 쓰는데 '녹슨 지대'라 번역한다)'이다. 지나가는 개도 일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데 작년에 인구가 최초로 감소하고 찬바람이 휭휭하다고 한다. 
군산GM 철수 때에 보여준 소동은 울산 거제의 '녹슨 지대'로, "나를 좀 임금노예로 데려가시오."밖에 안된다. 일할 권리가 아닌 좋은 삶을 살 권리는 "GM 철수하지 마시오.'가 아니라 "지역을 바꾸자!"라고 외친다. 일자리와 경제는 삶의 수단인데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된다. 노동과 경제는 발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이다. 

생산이 모자란가? 아니다. 인류가 좋은 삶을 살기에 생산은 충분하다. 음식물쓰레기는 굶주리는 인류 전부를 해결할 수 있다. 일자리게 없는게 아니다. 부가 소수의 손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해매다 2~3%경제가 성장한다는데 왜 일자리는 부족한가? 10년이면 30%인데? 더 생산하고 성장하자는 경제학작와 정치인의 구호는 이 단순한 통계에서도 거짓이 드러난다. 그들은 불편한 진실을 은폐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통계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두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일자리를 늘려달라고 애원하는가? 왜 일자리에 영혼을 파는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필자는 건축기술사라는 좋은 자격을 가지고도 날품팔이 비정규직 목수 또는 건설 노동자로 살고 있다.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산다. 일자리를 요구하는 대신에 사회, 아니 거기까지는 어려우니 우리가 사는 지역을, 마을을 바꾸자는 것이다. 국가, 청와대, 대통령, 국회의원을 말하는 시간에 단체장을, 지방의원을, 마을을 말하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국가주의를 가졌다. 지역주의, 마을주의를 가지자. 마을에 공유지와 마을작업장을 만들고 도시와 농촌이 연대하자. 

특정 지구에 돈을 쏟아붓는 도샘재생사업은 뜨는 동네, 지는 동네를 반복할 뿐이다. 이 모든것들이 민중의 직접 소유권과 마을권력을 세우는 직접민주주의이다. 자역의 노동, 생산, 소비, 교환을 바꾸는 비자본 주의 호혜경제의 시작이다. 미을총유와 마을작업장, 소농두레에서부터 개벽은 시작된다. 우리의 삶의 대의권력에 위탁하지 말자. 마을총유와 마을민회를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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