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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

  • [칼럼]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페미니즘을 등지지 않는다 - 이재랑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페미니즘을 등지지 않는다

 

이재랑 (정의정책연구소 청년위원)

 

"옛날에 한 용감한 사내가, 사람들이 물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중력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이러한 관념을 미신적 관념, 종교적 관념이라 공언하고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버리기만 하면 모든 수해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일생 동안 중력의 환영과 싸웠는데 (...) 이 용감한 사내야말로 독일의 새로운 혁명적 철학자들의 전형이다." 마르크스·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중

 

이는 당대의 '청년 헤겔학파'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이었다. 생각만 바꾼다고 존재하던 중력이 갑자기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사회 문제도 이와 같아서 '빈곤'이라는 관념만 없애면 빈곤이 없어지거나 실업이 문제라고 생각지만 않으면 실업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인식과 결별해야만 진정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중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마침내 극복하였을 때, 인간은 하늘을 날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청년 헤겔학파들은 그러나 이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는 빛나는 그들의 사회 인식은 유독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만나면 관념론의 필터를 거치며 비현실적으로 변한다. '젠더 문제'는 '페미니즘'이라는 '잘못된' 관념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면 해결 될 거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그렇다.

 

페미니즘이라는 관념과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사회의 '청년 헤겔학파'들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이 사회의 페미니즘을 실제로 떠받치고 있는 힘은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 대중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젠더 불평등 문제 그 자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애써 부정한다고 하여 깊고 너른 젠더 불평등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그것은 빈곤 문제, 실업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불평등 문제의 하나로서 작용한다. 그렇다면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란 자명하다. 그것은 ‘젠더 문제’라는 관념을 몰아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이야기 하고 있는 젠더 불평등 문제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이다.

 

젠더 불평등 문제가 과거의 일만이 아닌 현존하는 문제라는 건 이 사회에 대한 실증적 분석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OECD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OECD 평균(13.8%)을 훨씬 웃도는 34.6%에 달한다. 또한 우리의 통념과 달리, △출신 학교 △세부 전공 △국외 어학연수 여부 △가족 배경 등 모든 변수를 통제했을 때에도 대학 졸업 이후 2년 이내 여성의 소득은 같은 ‘스펙’을 가진 남성의 82.6%에 불과했다(김창환, 오병돈, 「경력단절 이전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가?: 대졸 20대 청년층의 졸업 직후 성별 소득격차 분석」, 『한국사회학』, 2019?). 경력단절 이전의 젊은 여성들조차 오로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나이대의 남성에 비해 소득이 낮은 것이다.

 

앞서 인용한 논문의 저자 김창환 교수가 본인 블로그에서 덧붙인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자면, 졸업 후 경력 단절 발생 이전까지의 여성 임금은 남성 임금에 비해 19.8% 낮았는데 이것이 실제로 젠더 문제가 아닌 전공별 직업군 차이에 기인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구체적인 졸업대학(총 370개 대학), 세부 전공(총 205개 전공), 졸업대학 광역소재지, 대학 평균 학점, 해외 어학연수 여부, 자격증 보유 여부, 인턴 경험 여부, 직업 훈련 여부, 대학 재학 중 아르바이트 여부, 졸업 고등학교 종류 등 거의 모든 인적 자본을 통제하고 다시 분석해보았더니 그럴 때조차 성별 소득 격차는 겨우 2.4%만 줄었다는 것이다.

 

이는 같은 경력,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나와도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17.4%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크 연령대에서 한국의 성별 소득격차는 30%를 훨씬 웃도는데 이미 20대 때에도 15~20%의 성별 소득 격차가 있다는 것은 피크 연령대의 성별 소득격차의 원인이 경력단절보다는 차별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사회 진출의 시작점인 20대부터도 남녀 간 성별 소득 격차는 이미 상당하다는 것이다 임금 격차는 젠더 불평등의 아주 일부만을 보여주지만, 그마저도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 사회 문제들을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더 많은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실증적 분석을 반박하는 것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 진영에도 퇴행적 이념과 자폐적 행동 양식을 가진 자들은 존재한다. 페미니즘의 이름을 내걸었다고 하여 모든 악행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걸 빌미로 '페미니즘은 병이다' 같은 말이 횡행하는 현실을 보고 있으면, 아주 익숙한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표방했다는 이유로 북한의 퇴행적 이념과 봉건적 사회제도를 거부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조차 모두 뭉뚱그려 ‘종북’으로 취급했던 것이 그동안 대한민국의 역사 아니었는가. 그러니 페미니즘이란 차라리 이 시대의 사회주의다. 사회를 바꾸겠다고 선언한 이들, 심지어 이 사회의 금기어인 '사회주의자'를 자처할 만큼 용감한 자들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부당한 편견과 차별에도 마땅히 힘있게 맞서 싸워야 한다. 진영과 상관없이 페미니즘이 내걸고 있는 해방적 이념을 무력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단호히 비판해야 한다. 그것은 페미니즘이 완전무결한 이념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에게 드리워진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을 인식하고 그것을 철폐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여성들에게 드리워진 사회적 차별을 폭로함으로써 모두의 연대를 위한 단초를 마련하였다. 우리 사이의 진정한 연대를 가로막은 것은 바로 젠더 불평등의 문제였다는 것,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의 연대 의식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것. 사회주의가 인간성을 말살케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착취에 맞서 인간 중심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들을 뜻한다면, 페미니즘 역시 그동안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여성 착취의 세상에서 그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고 인간으로서의 여성, 주체로서의 여성을 선언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 사회의 불평등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은 함께 전진해야 한다. 아니, 그 둘이 함께 전진할 때야말로 보편적 해방은 성큼 다가온다.

 

그리하여 이 땅의 진정한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페미니즘을 등지지 않는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서로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부조리함, 그 모든 것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 사회에 드리워진 불평등의 문제와 사회적 모순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함께 극복해낼 때,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또한 끝끝내 패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인간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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