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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칼럼

  • [이재랑 칼럼] 청년들은 이미 늙었다, 이재랑 정의정책연구소 청년위원

청년들은 이미 늙었다
 

 


이 재 랑
(정의정책연구소 청년위원)

 

한 교육감의 글에 2600개의 좋아요, 1600개의 댓글이 달렸다. 공무원들의 SNS가 으레 그렇듯 평소 100개가 안 되는 좋아요를 받을 뿐이던 노옥희 울산 교육감의 이런 갑작스러운 인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글의 내용은 다음 날(824) 예정된 태풍의 위험 때문에 휴교 권고를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었다. “울산 유치원, 초등, 중학교, 특수학교는 휴업, 고등학교는 오전 10시 이후 등교 권고 결정했습니다.” 고등학교는 휴업이 아니라 ‘10시 이후 등교를 권고한 것이다. 고등학생만 차별하는 이 불공정에 대한 항의로 댓글란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교육청의 잘잘못을 말하기 전에, 학생들의 분노가 향하는 지점이 자못 흥미롭다. 휴교 결정 기준의 합리성, 권고 대상의 선정 범위, 태풍의 실질적 위험에 대한 교육청의 판단 근거 등은 당연히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초중생은 쉬는데 왜 고등학생인 우리만 못 쉬느냐는 성토였다. 상대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차별불공정으로 곧바로 받아들이는 아찔한 윤리성이다. 사태가 이처럼 흐르게 되면, 다음 날 실제로 태풍이 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생들이 차별당했기 때문이다. 공정성에 대한 학생들의 감각은 이처럼 날카롭다.

 

이런 감각은 이미 6만여 명이 넘게 참여한 유은혜 장관 후보자 지명 철회 청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후보자의 각종 자질 논란을 생각해보면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다는 것이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이유가 눈에 걸린다. 유은혜 후보가 의원 시절 추진했던(그리고 또 철회했던) ‘비정규직 학교 구성원들의 정규직화에 대한 반응이 그렇다. “누구의 소개로, 누구의 백으로 쉽게 들어와 적당히 편한 일을 하면서 비정규직이라는 자리를 선택한 사람들이 진정 사회적 약자이고 소외 계층인가요?”, “지금 비정규직은 모두 불쌍한 사람이라는 논리가 맞는 건가요?

 

학생들은 이미 이 공정성이라는 신화에 깊이 잠식된 것처럼 보인다. 일반고 대입에서 일종의 쿼터제 역할을 하는 수시 제도에 대한 규탄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리지 않는다. 대입 제도를 다룬 기사들의 댓글을 보면, 수능이 비록 부족한 점은 있을지언정 가장 공정한시험이므로 수능 시험의 비중을 줄이려는 모든 대입제도 개혁의 시도는 불공정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베스트 댓글로 올라와 있다. 이미 학생 사회에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단어들이 만들어져 있다. 농어촌 학생들을 위한 특별 전형(지역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한 서울대생을 벌레로 묘사한 지균충이라 부르고, ‘학생부 실적이나 좀 챙겨서대학 간 학생들을 수시충이라 부른다. 공정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대가로 받아야하는 멸칭이다.

 

이들이 말하는 공정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등교시간이라는 기준에서도 고등학생이 불리해서는 안 된다. , 중학생들만 특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 나이가 많은 학년이라고 해서 나이가 어린 학년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사회생활과 같이 학교생활 또한, 같은 기준에서 공정하게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정성은, 이처럼 개인의 개별적 차이와 상관없이 같은 기준에 의한 경쟁을 말한다. 이들의 생각에 비추었을 때,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사회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 , 중학생은 공교육 안에서 고등학생과 경쟁하면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국영수탐 실력으로 소득이 분배되어야 한다. 바리스타나 프로그래머가 열심히 일해서도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노동하는 과정의 노력이 아니라 학창시절의 노력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악한 노동환경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불성실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라면 등교시간 차등분배 역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시험도 학사행정도, 학생의 권리 뿐 아니라 평생의 인권을 절차적으로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비상시 안전대책도 마찬가지다. 더 어린 학생들을 위한 배려가 게임의 룰로서 공정한가 아닌가를 따지는 태도는, 경쟁의 대상이 아닌 것마저 공정하게 경쟁시켜야 한다는 강박의 산물이다. 이 등교게임을 뛰는 선수들은 트랙의 안과 밖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승부에 집착하고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패러다임이 보편적 인권의 영역마저 공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경쟁이라는 말만 붙이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공정하고, 경쟁에 의한 결과는 그것이 불평등이든 차별이든 무조건 최선이라는 경쟁만능주의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경쟁의 영역 밖에 놓여 있어야할 많은 것들이 공정성이란 외피를 덧입고 경쟁을 통한 분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편적 평등의식 따위는 사치스러운 농담으로 비친다." 이쯤 되면 학생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의 얼굴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우리의 질서가 학생들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이런 사회 질서를 내면화한 것은, 결국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낸 질서를 습득한 데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청년들에게만 이 질서의 책임을 묻는 건 옳지 않다. 공정성에 대한 그들의 신경증적인 집착은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 여태껏 공정성이란 없었음을 방증할 따름이다. 다만 그 공정성의 결핍을 강자의 횡포가 아니라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공격함으로써 해소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평등의식을 훼손하며 이는 더 나아가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화국의 정신마저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미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약자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청년들의 극우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년들은 이미 늙어버렸고, 그 늙음은 지금의 사회 질서를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결국 청년들의 노화를 막기 위해선 본받을 다른 좋은 꼰대들을 호명하는 수밖에 없다. 이미 만들어진 사회의 질서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적응하라는 요구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그리고 그 가능성과 방법을 청년들에게 전수해줄 꼰대들. 과거 왕조 시대에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는 좋은 꼰대란, ‘이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는 “‘현대의 군주란 계급과 결합되어 있는 정치적 정당’”이라 말한 바 있다.

 

그람시의 정의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결국 늙은 청년들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해 줄 좋은 꼰대란, 현 시대에선 거의 유일하게도 좋은 정당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단호하게 맞서 싸울 강력하고도 정의로운 정당의 정치. 이 사회의 젊음은 결국 그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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