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향신문] "맑스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다", [인터뷰] 정년퇴임 앞둔 '진보 마이웨이' 손호철 교수
"맑스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다"
[인터뷰] 정년퇴임 앞둔 '진보 마이웨이' 손호철 교수
 
과거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연구실을 몇 차례 찾은 적이 있다.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80년대 사회과학 서적들을 비롯해 넓지 않은 연구실을 빼곡하게 채운 책 냄새가 늘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손 교수 연구실을 다시 찾았다. 진보 정치학계를 대표해온 손 교수가 내년 2월 정년퇴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이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제 다른 공간으로 옮겨질 손때 묻은 책들이 책장 밖으로 쏟아져 나와 유난히 주인 닮은 향기를 내고 있었다.
 
오는 7일 서강대에서 정년퇴임 강연이 예정돼 있다. 제목은 '마르크스주의, 한국 예외주의, 시대의 유물론'. 학자 손호철의 학문적 자취와 개인 손호철의 삶을 함께 담은 주제를 그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손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본다. "한쪽 날개는 독수리 날개(보수), 한쪽 날개는 병아리 날개(진보)"인 한국 정치의 기형적 토양은 '한국 예외주의'로 설명한다. 진보 좌파 비주류의 길을 걸어왔으되 "선택받은 삶을 살았다"고 돌아보는 개인사를 '시대의 유물론'으로 풀어낼 예정이다. 
 
내년 2월 정식 퇴임에 즈음해 그동안의 학문적 성과와 언론 칼럼들을 집대성한 <손호철의 사색>도 출간할 예정이다. 이론, 한국정치, 정치평론, 교양 등 네 가지 분야를 각 권으로 묶는다. 이에 더해 지성사, 시대사를 조망하는 책들도 추후 순차적으로 출간해 총 18~20권의 책을 낼 계획이다. 
 
손 교수는 강단에만 머문 학자가 아니었다. 칼럼니스트로서, 언론을 통해 현실정치의 복판을 날카롭게 해부해왔다. 원조 독설가라 해도 무방할 만큼 에두르지 않는 직설 화법이 매력. 제도 정치의 실패로 시민들이 촛불을 밝힐 때마다 광장에도 숱하게 모습을 보였다.
 
특히 보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을 구분하는 '민주-반민주 전선',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세력을 구분하는 '신자유주의 전선' 개념은 손 교수가 소위 '민주정부' 시기에도 가장 왼쪽에서 정권에 대한 비판을 거두지 않는 바탕이 됐다.
그는 '촛불 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 역시 증세에 미온적인 점 등을 들어 "신자유주의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고 했다. 또한 '시행령 정치'를 우선하며 입법을 통한 제도적 개혁을 위한 협치에서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했다.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대해서도 "과거 정부에 대한 단죄로 호응을 얻고 있지만, 헬조선에 대한 분노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했다. 
 
현 시기에 손 교수가 가장 강조하는 정치개혁 과제는 선거제도 개혁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라는 거대 양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를 바꾸지 않고서는 보수 일변도의 '한국 예외주의'가 깨지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세력과 정당에는 "21세기적인 '녹보적 연대', 즉 그린(생태), 보라(페미니즘)와 전통적인 레드(노동)가 연합한 무지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며 제4기 진보운동을 주문했다.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그는 퇴임 강연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를 부를 계획이다. 외골수 진보학자에게 어울리는 선곡이다. "후학들에게 쉼터와 그늘이 되어주는 당산나무처럼 늙고 싶다"는 손 교수의 '30년 마이웨이'를 옮긴다. 인터뷰는 프레시안 협동조합 박인규 이사장이 함께 했다. 
 

▲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럼에도 나는 선택받은 삶을 살았다" 
 
프레시안 :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해직된 뒤 학계에 몸을 담았다.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교수로서 활동도 왕성했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는 소회가 남다를 텐데.
 
손호철 :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민주화 운동을 했고 감옥도 가고 재적도 당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힘든 길을 살아간 것에 비하면 정말 축복받았다는 생각을 같이 한다. 
 
프레시안 : 스스로를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라고 규정하면서도 선택받은 삶을 살았다는 양가적 감정 같다. 
 
손호철 : 이 사회 주류는 반공주의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비주류였다. 비주류에서도 중심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세력이다. 우리사회에서 진짜 고생한 진보세력은 비주류의 비주류로 외로운 길을 갔다고 본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중심은 진보우파라고 하는 과거 NL이었다. 진보좌파는 다시 또 비주류가 된다. 진보 속에서도 비주류다. 그래서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 얘기를 한 거다. 
 
나는 '시대의 유물론'이라는 표현을 한다. 동시대에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나만 해도 정몽준 의원, 박근혜 전 대통령과 70학번으로 동기다.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물질적 조건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의 규정성이 있다고 본다. 세대는 단순한 나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나이와 역사적 경험의 결합이다. 한국의 '386 세대' 미국의 '68혁명 세대' 등…. 요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N포 세대'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나는 교수로 편한 길 갈 수 있었지만 거리로 나왔다. 그럼에도 이미 65세까지 정년을 했으니 선택받은 삶이다. 내가 30년 전에 태어났다면 일제시대를 겪었을 것이고, 30년 후에 태어났다면 요새 젊은이들처럼 스펙 전쟁하고 N포 세대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현대사로 보면 가장 선택받은 세대가 아닌가 싶다. 유신 시대에 대학 시절을 보냈지만, 미국유학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돌아와서도 정규직 교수로 서울의 명문대에서 보냈다. 대학 내에서도 소수만 하는 학장과 대학원장까지 했으니 선택된 세대이고 선택된 삶을 살지 않았는가라는 양면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늙음에 대해서도 생각할 때가 오는데, 동물적 늙음과 식물적 늙음이 있다고 본다. 동물적 늙음을 비유하자면 사자다. 백수의 왕도 나이가 들면 젊은 사자에게 쫓겨나 죽는다. 식물적 늙음은 당산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마을의 큰 나무가 되어서 쉼터가 되고 그늘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식물적으로 늙고 싶다. 
 
그동안 젊은 제자들과 진보적 학자들의 보호막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예민한 글을 많이 쓰다 보니 적도 많이 만들었다. 어디 가서 '손호철 제자'라 하면 득보다 실이 많았을 것이다. 당산나무 같은 역할을 못해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제자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프레시안 : 12월 7일 퇴임 강연 때 깊은 말씀을 하겠지만, 어떤 내용의 강연을 준비하고 있는지 미리 소개 부탁한다. 
 
손호철 : 정년퇴임 강연 제목은 '마르크스주의, 한국 예외주의, 시대의 유물론'으로 정했다. 학문적인 내용이 앞의 두 가지이고, 시대의 유물론은 내 삶의 이야기다. 
 
내가 학자로서 그동안 역할을 한 분야가 이론으로서는 맑스주의, 특히 맑스주의 정치학이다. 맑스주의 정치학 중 국가론에서 여러 신진적인 신좌파국가론 연구를 도입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또한 한국정치와 관련해 진보적 시각에서 학문적 작업을 했다.
 
퇴임 강연은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맑스주의가 아직도 유용하다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3가지 범주가 있다. 이론, 운동, 체제로서의 맑스주의다. 세 가지 모두 현대에서 위기에 봉착해 있다. 특히 체제로서의 맑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이 무너지면서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의 기여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할 핵심적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한국정치에 관한 화두도 생각하고 있다. 새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고 하는데 한국은 왜 한쪽 날개만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의 한쪽 날개는 독수리 날개고 한쪽 날개는 병아리 날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진보와 보수가 유럽의 선진국처럼 균형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문제를 이야기 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나의 고민과 시대의 이야기를 책에 담을 것" 
 
프레시안 : 내년 2월 정식 퇴임에 즈음해 방대한 분량의 출판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손호철 : 학문적으로 지금껏 해왔던 것을 정리해보려 한다. 나는 단행본 중심보다는 정세적 논문을 많이 썼다. 그 논문들을 정리하려고 분류해보니 크게 이론, 한국정치, 정치평론이고 교양이나 문학, 음악, 미술 관련 분야도 썼다. 지금은 많은 글들이 절판되어 읽을 수 없게 됐는데, 이를 정리해보려 한다. 
 
이론 분야는 1000쪽 정도이기 때문에 두 권으로 낼 예정이다. 국가 권력, 민주주의, 지구화 같은 문제가 중심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포스트 맑스주의로 이론적 한계에 부딪쳤던 때였다. 더 이상 실천적 의미가 없는 고답적인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부분 한국정치 이야기를 했다. 나의 주된 연구는 2000년대 초반에 끝났지만, 지금 읽어봐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총론적 글이 500쪽 정도 된다. 시기별로 구분했다. 해방 때부터 87년 민주화까지 한권, 87년부터 97년 세계화까지 한권, 97부터 지금까지 한권으로 묶으려 한다.
 
내가 기자출신이어서인지 정치평론도 많이 썼다. 91년부터 800여 편을 썼더라. 한 달에 평균 2편 반 정도 쓴 셈이다. 프레시안에도 많이 썼다. 2015년에 '국민모임'이라는 현실 정치와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고정칼럼을 다 끊었다. 그것들이 3500매 정도 된다. 출판사 하는 제자는 출판업자로 그게 제일 탐이 난다고 하더라. 정치학자가 본 한국 현대사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집으로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양, 문학, 여행 등의 주제를 엮을 계획이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시대사 중에서도 지성사를 쓰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고민했는지, 시대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정말 재밌는 이야기가 많다. 제목은 '운칠기삼'이다. '인생은 운이 7할이다'라는 뜻이다. 
 
김세균 선생과 같이 감옥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잡범하고 수감됐고, 김세균 선생은 대한민국 최고의 제비족과 같은 방을 썼다. 그 제비가 춤 실력이 녹슬면 안 된다고 감옥에서 하루 10시간씩 춤을 췄다. 같이 수감됐던 김세균 선생은 대한민국 최고의 춤꾼이 되어 나왔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운이 참 중요하다. 대한민국 진보정당이 어려울 때 "강남에서 '김세균의 문화교실'을 개설해서 4년간 강남 아주머니들에게 춤 가르치고 출마합시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 중심의 시대사를 써보고 싶다. 시대의 유물론이란 제목이 거기서 나온 것이다. 
 
언급한 분야를 다 분류해서 내면 18~20권이 된다. 그 책을 한꺼번에 낼 수는 없다. 내년 2월 정년 때는 앞서 말한 네 분야를 먼저 정리해서 내려고 한다. 이론, 한국정치, 정치평론 그리고 교양 분야를 한 권 씩 계획하고 있다. 이론은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해, 한국정치에서는 총론적인 글을 낼 것이다. 정치평론은 박근혜 시대와 관련해 '유신공주와 촛불'이란 주제로, 그리고 교양 부분은 '즐거운 좌파'다. 이 시리즈의 제목은 <손호철의 사색>이다. 이중적 의미다. 생각한다는 의미의 '사색'이고, 색깔을 달리하다는 뜻의 '4색'이다. 그 외의 책들은 나이 70대쯤까지는 내보자는 생각이다. 지성사는 새로 써보려 하고 있고 정치평론도 지성사의 측면에서 전반적인 조감을 할 수 있는 책을 내려고 한다. 그런 작업 속에서 나의 학문적 성과와 한계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프레시안 : 성년이 된 이후 40여 년을 대학에서 보낸 셈인데, 70~80년대에 비해 이제 대학을 지성과 비판의 전당이라 부르기 어려워졌다. 사상과 지식의 힘이 약화된 대학이라는 비판에 공감하나? 
 
손호철 : 우리사회가 반지성 사회가 되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고문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잘못된 일을 하는 줄은 알았다. 미안한 줄 알았다. 민주화 세력, 혹은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하고 나서 이런 경향이 사라졌다. 도덕적 우위가 사라지고, 증오의 정치가 지배한다. 이제 '빠의 정치'가 지배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누구 편인가만 남았다. 반지성 사회의 징후다. 지성사회를 담당했던 대학이나 언론에서 탈지성화가 심각하다. 모두 기능화 됐다. 지성인이 아니라, 지식공학자, 지식엔지니어가 되어가고 있다. 
 
몇 해 전 내가 학문의 위기를 발표하며 자본의 공장, 인력공장으로서의 대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학생들은 경영학만 듣고 교수도 통계만 가르친다. 민교협에는 나이 많은 교수들만 남았다. 젊은 교수들이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승진하려면 논문 제조기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도 완전히 진영논리에 들어갔다. 
 

ⓒ프레시안(최형락)

"신자유주의 전선은 아직 해체되지 않았다" 
 
프레시안 : 현실참여적인 글을 왕성하게 발표한 진보학자로서, 한국정치에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손호철 : '계급'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두드러기를 일으킨다. 계급을 말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다. 물론 지금 우리사회에는 계급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젠더 문제 같은 것들이다. 과거 맑시스트들의 계급 환원론적 사고는 비판 받아야 하지만 자본주의가 있는 한 그것을 설명한 강력한 수단으로 맑스주의는 상당히 유효하다.
 
한국정치에서도 정당정치나 현실정치를 계급론으로 환원하려는 본질주의는 잘못이다. 유럽식 계급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한국정치는 기본적으로 초계급적 지역정치다. 거지부터 부자까지 영남에 사는 사람들은 영남당을 찍으니 한국정치에 계급은 별로 설명력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맑스주의적 분석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정치에 계급이나 사회적 이익관계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프레시안 : 손 교수는 한국정치의 세력 관계를 셋으로 구분해 2중 전선의 틀로 설명해왔다. 보수 세력, 자유주의 세력, 진보 세력이다. 이에 대입해보면,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세력은 때로 협력하고 때로 갈등하며 강력한 보수와 맞서는 관계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지만, 지금 같은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이 2중 전선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가 현재까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서 보여주는 지향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손호철 : 진보와 보수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유연한 진보를 이야기 한 바 있고, 뉴라이트도 자기들이 진보적 우파이고 진보 세력을 수구적 좌파라고 한다. 진보와 보수를 이해하는 방식은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변화에 대한 태도다. 변화에 찬성하면 진보, 변화에 반대하면 보수다. 이 기준에 따르면 5.16 쿠데타와 히틀러의 집권은 진보다. 어떤 방향의 변화이냐를 무시하고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정도의 차이다. 이 기준에서는 미국 민주당은 진보적이다. 한국의 더불어민주당도 진보적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절대적인 이념적 스펙트럼을 못 본다. 한국과 미국은 거의 유일하게 진보적인 세력이 없는 나라다. 
 
세 번째는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다. 사민주의 이상이 진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진보라는 용어는 리버럴, 프로그레시브 정도에 해당한다. 네 번째는 해체적인 방식이다. 2007년 대선 때 <이프>라는 페미니즘 잡지에서 여성운동 진영은 박근혜를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가장 진보적인 남성 후보 권영길보다 가장 보수적인 박근혜가 더 진보적이다. 
 
한국 정치는 개혁진보 진영이라고 뭉뚱그려서 이야기해왔다. 민주-반민주 구분법이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개혁입법들, 즉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은 것이 전형적인 민주-반민주 전선이었다. 자유주의 진영과 진보가 연합해서 보수 세력인 새누리당과 싸웠다. 반(反)이명박, 반박근혜 전선, 반새누리당 전선, 이런 것이 모두 민주-반민주 구분이다.
 
그러나 개혁입법이 실패한 이후,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를 추진하고 노동법 개정으로 정리해고를 넓히려 했다. 한나라당과 손잡고 한미 FTA를 추진했다. 신자유주의 개혁에선 노무현, 김대중, 조중동, 재벌이 같은 편이었다. 그래서 민주노총, 참여연대, 진보정당 들이 반대했던 것이다. 전선이 두 개로 나눠진 것이다. 반대로 지난해 촛불 같은 경우 상당히 달랐다. 보수진영 내에서도 수구적 세력과 다른, 개혁적 보수라 볼 수 있는 바른정당 세력이 함께 촛불 혁명을 성공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경험과 노하우, 체험이 있다. 이를 통해 경제민주주의를 중시하고 양극화가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했다. 노무현 정부보다는 좌클릭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 전선이 없어졌는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을 보자. 혁신성장에는 신자유주의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고, 소득주도 성장도 과연 탈신자유주의로 나아갈 수 있느냐는 점에서 회의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증세 논쟁이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와 근본적 단절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고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면 진보와 자유주의 세력을 구분하는 신자유주의 전선을 해체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를 좌측으로 이끌어가는 데에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전선이 강화되고 민주-반민주 전선이 약화됐다. MB, 박근혜 정부 때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후퇴해 민주-반민주 전선이 강화됐다. 지금은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선 초기다. 노무현 정부와 달라진 주요한 조건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이라는 변수를 꼽을 수 있다. 일반 국민들에게 정서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공격적 방어주의를 갖게 된 것이다. '문재인도 노무현의 비극을 반복해선 안 된다'는 정서로 정당한 비판을 봉쇄하는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신자유주의 전선이 약화된 데에는 진보 정치와 진보운동 자체의 동력이 약화된 측면도 있다. 현재 같은 진보 세력의 힘으로 문재인 정부를 보다 진보적으로 견인할 수 있을까? 
 
손호철 : 맑스는 왜 극빈자가 아니라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고 했을까? 노동자가 체제를 전복할 전략적 힘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이 위기다. 우리의 경우 전략적 힘을 가진 대기업 노조나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해관계가 절실하지 않다. 정말 절실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략적 힘이 없다. 노동자가 분열되어 있다. 전투적 조합주의의 노동운동을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한 박자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진보 운동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냐고 이야기 하지만, 진보 정당은 한국 예외주의 자체다. 87년 민주화 이후 반공주의가 약화되니 지역주의가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구조적인 조건이 아니라 주체적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진보운동이 스스로 대중적 신뢰를 잃어버렸다. 우리나라 진보운동은 제3기가 끝났다고 본다. 새로운 순환이 시작돼야 한다. 1기는 일제와 해방공간에서 싹튼 민족해방운동, 진보운동이다. 2기는 4.19 이후 진보운동이 폭발적으로 살아났다가 5.16 쿠데타로 끝났던 시기다. 3기가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진보운동이다. 그러나 끝났다. 친북 문제, 패권주의, 통진당에서 보여준 비민주성 같은 것들이 결합해서 스스로 자멸했다.  
 
이제는 새로운 제 4기 진보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21세기적인 '녹보적 연대', 즉 그린(생태), 보라(페미니즘)와 전통적인 레드가 연합한 무지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정당이 과거 민주노동당과 같은 성공적인 모멘텀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있다. 한편으론 노무현 대통령 죽음으로 촉발된 대중들의 혼란도 겹쳐있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헬조선, 흙수저 등 한국의 열악한 현실을 드러내는 여러 문제들이 결국 진보운동의 물질적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질 좋은 대의제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시급"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정체성을 촛불정부로 규정하고 있다. 표방하는 정체성에 걸맞는 국정 운영을 해왔다고 보나? 
 
손호철 : 잘하고 있지만 협치를 너무 못한다. 대국민 정치를 평가하면 A학점 줄 수 있다.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있다. 비교 기준이 되는 박근혜 정부가 워낙 점수가 낮으니 그렇다. 하지만 여의도 정치는 청와대에서 밥 한번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총리는 최소한 국민의당에 추천해보라는 식으로 했다면 어땠겠나.  
 
협치가 안 되다 보니 남미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시행령주의' 일변도다.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입법이나 법 개정은 국회 소관이라 쉽지 않다. 개헌 역시 동력을 잃었다고 본다. 그래서 답답하다. 
 
정치 보복이라는 반발 속에도 적폐 청산은 래디컬하게 하고 있다. 촛불이 제기한 적폐 청산 과제 중 국정교과서, 공영방송 정상화 문제도 해결해가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사드 문제는 국제정치와 연결돼 있는 어려움을 인정하더라도, 북한이 미사일 쏘니까 갑자기 배치를 결정해버렸다. 문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유보할 때는 북한이 미사일 쏠지 몰라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적폐청산이라는 과제를 조금 협소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과거 정부에 대한 단죄는 신속하게 하고 있는데, 입법적 과제라든지 제도적 변화가 필요한 과제들은 진척이 없다는 우려 같다.
 
손호철 : 촛불이 요구한 적폐청산 과제는 크게 독재와 관련된 박정희 체제, 불완전한 민주화를 의미하는 87년 체제, 신자유주의를 의미하는 97년 체제다.
 
문재인 정부는 이 가운데 박정희 체제 부분에서 과거 정부에 대한 단죄로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87년 체제와 관련해선 정치개혁에 의지가 보이지만, 협치가 아닌 승자독식주의적인 태도로 그 기회를 날려버리고 있다. 승자독식주의 자체가 87년 체제의 산물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연정이나 협치를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촛불 정신에 깊이 박혀있는 97년 신자유주의 체제, 즉 헬조선에 대한 분노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증세 문제를 회피하는 경향 등을 보면 걱정스럽다. 
 
프레시안 : 진보정당의 성장을 일관되게 가로막은 제도적 장치는 선거제도다. 정치권에서 개헌이나 선거제도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전망하나.  
 
손호철 : 지난 촛불 혁명의 과정은 1~3기가 있었다. 국민들이 박근혜 탄핵을 압박한 1기, 국회가 힘을 모아 탄핵안을 처리한 2기, 헌재가 탄핵을 완성한 3기다. 그러나 그 후 너무 빨리 무장해제했다. 개헌이나 선거제도 문제를 압박해야 했는데 대선 국면에서 전혀 하지 못했다. 다시 그들만의 리그로 되돌아가고, 개헌은 다시 정치권이 전담한다. 선거제도 개혁도 그렇다. 
 
75% 이상의 국민들이 탄핵을 지지했다. 그 지지율이 대선 때 각 후보들이 나누어가진 지지율과 일치한다.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20% 남짓인데 의석은 몇 석인가. 민심 지지도와 의회 분포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개헌이 어렵다면 선거제도 개혁이 더 중요하다. 대의제의 실패 때문이다. 외국 교수들이 와서 한국의 희망버스를 구경하러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창피했다. 그들은 한국 민주주의를 부러워하지만, 한국의 왕성한 거리 정치는 제도 정치 실패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제도 정치가 잘해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적 균열이 정치적 균열에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니 거리로 나오는 것이다. 
 
촛불도 한국 예외주의에 따른 대의제도의 실패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직접민주주의의 강화도 중요하지만, 질 나쁜 대의제를 질 좋은 대의제로 바꿔야 한다. 이미 헌재가 인구편차 2:1을 넘는 선거구 획정이 위헌이라고 했다. 과거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11%였는데 의석은 3%에 불과했다. 현재의 정의당도 6% 지지율을 얻었는데 의석은 2%다. 자유한국당과 더불어 민주당은 득표율보다 많은 의석을 가지고 있다. 진보정당에 던진 표는 보수정당에 던진 표에 비해 4분의 1밖에 반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위헌적 선거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촛불 정신으로" 
 
프레시안 : 정의당 싱크탱크인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그나마 제도정치에 남은 진보정당의 활로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손호철 : 내가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한 번도 진보정당의 당원이 된 적이 없었다. 진보정당이 분열했던 점이 이유였다. 민주노동당이 제도정치에 진입한 이후에도 원외 좌파 운동이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매체에 칼럼을 써왔는데, 한국사회는 지식인의 정파성을 색안경 끼고 본다. 진보학자 중에서 제도정치권에 목소리를 내고 지면에서 이를 알릴 수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내가 당원이 되어 이런 활동에 제약받는 것보다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진당 사태를 보고 정말 반성했다. 진보 지식인들이 당에 안 들어가서 이렇게 됐다는 반성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학계에서 쌓아온 명성이 새로운 제4기 진보운동에 보탬이 된다면, 진보정당 복원에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다 세월호 사태가 발생해 새로운 정치모임인 국민모임을 만들었다.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을 촉구하는 의미였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국민모임과 노동정치연대. 진보신당 쪽에서 나온 진보결집, 정의당까지 4자 통합으로 통합 정의당을 만들었다. 2015년 10월, 그 때 처음으로 내가 진보정당 당원이 됐다. 
 
앞서 언급한대로 문재인 정부에서 진보 정치세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특히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쉬운 이야기로 일면으로 연대하고 일면으로 비판하면 된다고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원론적이다. 어떤 걸 같이 하고 어떤 걸 비판할 것인가. 오히려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 존재감이 없어진 측면도 있다. 문재인 정부의 2중대라고 비판받는 부분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 각료에 임명 당시 명확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은 점은 오류다. 정의당이 너무 정세에 왔다 갔다 하면 안 된다. 정의당이 대표하고자 하는 세력, 즉 노동자, 비정규직,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를 대해야 한다. 
 
한편으론 진보정당이 '정당은 운동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당이 운동과는 달라야 하지만 사회운동적 정당이어야 한다. 사회운동을 끌어안아야 한다. 왜 촛불의 열기를 진보정당이 끌어안지 못했나. 그런 대중적 힘을 스스로 끌어안지 못했던 한계를 딛고 어떻게 하는 것이 촛불정신을 계승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프레시안 : 정치지형이 굉장히 복잡하다. 바른정당은 다시 자유한국당에 흡수되고 있고 국민의당은 우경화가 뚜렷하다. 진보정당은 소수다. 다시 양당 체제로 돌아가 한국 예외주의가 고착화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손호철 : 정의당은 5% 지지율은 얻겠지만, 영원한 5%로는 안 된다. 보수 역시 달라져야 한다. 오늘 학교에서 유승민 의원을 초청해 특강을 했다. 극우화한 한국보수를 글로벌 스탠다드로 정상화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봤다. 바른정당이 그나마 글로벌 스탠다드의 의미에서 보수다. 극우와 리버럴 정당이 강한 구도에서 유럽식 정당구도로 변해야 한다. 지금 잘못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강조한다. 경기규칙, 즉 선거제도가 중요하다. 지금과 같은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는 한 양당제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또한 촛불정신을 다시 만들어 내느냐는 과제도 있다. 촛불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오지는 않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촛불은 끄지 말아야 한다. 페이퍼 스톤, 즉 투표 용지가 이제는 짱돌이고 화염병이다. 선거를 통해 다시 과거와 같은 낡은 양당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촛불의 힘이 있다면 그 분노를 투표의 힘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촛불 정신에 어긋나는 것은 과감하게 심판하고 우리의 정신이 무엇인지, 새로운 대의제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위한 전략적 투표를 해야 한다. 
 
프레시안 : 그림이나 사진도 조예가 있는 것으로 안다. 퇴임 후에 개인적으로 좀 여유 있게 해보고 싶은 일들은? 
 
손호철 : 사진 찍어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항상 그림에 대한 향수도 있었다. 그림을 다시 그려볼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시대를 돌아보는 글을 쓸 것이다. 또한 강의에서 자유로우니 이제 홀가분하게 사회운동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가 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았고 결국 정년까지 했다. 시대를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 복 받았다라고 해야 하나.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다. 후배들과 아픈 시대를 겪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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