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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강. 모든 강의를 끝내고 나서 


1) 본 강사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일은, 현실의 정치를 (본 강사가 배우고 전공했던) 정치학의 언어로 설명하면서 정치학의 지식을 실제의 정치적 실천에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풀어서 말하고 쓰는 데 있다. 이번 강의 역시 그런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으로서의 정치학”과 “현실로서의 정치” 사이의 대화를 이어가는 데 있어 정당론이야말로 그에 가장 적합한 주제가 아닌가 한다. 정치학 안에서 정당론 분야는 “이론의 빈약함”으로 악명이 높다. 그렇기에 정당론만 열심히 공부한다고 현실의 정당 정치를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쉽게 찾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당 정치의 실제 경험을 추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현실의 정당”과 “이론으로서의 정당론” 사이의 깊은 간극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할 제약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사회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솔루션은 물론, 정당론의 빈곤을 채워줄 획기적 이론을 만들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한국적 현실에 맞는 정당론 혹은 그 가운데에서도 특정 성격의 정당이 필요로 하는 정당론을 탐색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걸 위해서라도 정당에 대한 이론과 우리의 현실 경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강의가 그런 조건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현실의 민주주의 내지 민주정치에서 정당만큼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정당에 대한 야유나 비난은 많아도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얼마나, 왜, 어떻게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리 체계적인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학계에도 선거 전공자는 넘쳐나도 정작 정당 전공자는 거의 없다. 당연히 대학에서 정당론을 가르치는 전공 교수도 드물다. 본 강사도 학부에서 정당론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한 외국 학자가 쓴 책의 “정당체계 분류론”을 한글로 요약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3) 정당정치를 하고 있는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정당정치의 언어와 논리를 모른다. 초선 의원들은 더욱 심한데, 정당정치에 복무하는 삶을 선택하면서 내면적으로 어떤 “자각적 결정”을 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모두들 “국민을 위한 정치”, “진보와 정의를 위한 정치”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그게 또 왜 정당 내지 정당정치의 역할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국민이나 진보, 정의를 앞세우는 초선 의원들의 공통된 특징은, 스스로 원해서 정당 정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이 원해서든 그간의 인맥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의 요청에 의해서든) 자기 외부로부터 요청과 제안이 있어서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데 있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현실의 정당 정치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생각했고, 그렇기에 정당 정치에 복무한다는 소명 같은 것에는 그다지 절실한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 같다.

 


 4) “정당 정치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자각 없이, 그저 국민을 위해 진보적이고 정의롭게 정치하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한가를 반문하는 식이 되면 민주정치는 유익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사실 그런 정치관은 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 비해 탁월하게 특출 난 사람들이 국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 “귀족정(aristocracy)”의 정치론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선한 정치 엘리트론”이라는 의미 이상, 현실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여야 어디를 봐도 거의 최대 의원집단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했던 “민주투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정당이든 갈 수 있는 그들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곧 진리고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알아봐 주는 곳이면 충분하다고 본 것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특정 정당에 헌신하는 정치인이 된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어떤 책임성을 갖게 하는지에 대한 숙고보다는 어디에서든 국민을 위해 정치하면 된다는, 자기중심적 선민의식이 더 많이 작용했을 거란 점이다.

 


5) 현실의 정치를 “민주 대 반민주의 싸움”으로 이해하면서 진보와 정의, 역사와 시대정신, 진심과 진정성을 앞세우는 사람을 본 강사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가치나 신념이 진짜라면 그건 자신의 내면에서 단단히 다져야 할 일이지, 그걸 앞세워 정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신념이나 가치에 맞게 현실을 개선하고 변화시키는 데 있지, 자신의 옮음과 선함을 과시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이 되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규정한다면, 대체 어떤 이유에서 민주주의자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왜 정당 정치인이 되고자 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부터 설득할 수 있는 이유나 논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기초 위에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혹은 (현대 정당론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탈리아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정당 다원주의(party pluralism)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정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변화도 있다.

 


 6) 정당 정치를 잘하기 위해 자신이 있는 것이어야지, 정당 정치가 자신이 가진 신념을 위한 수단이 되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정치가는 늘 자신의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한 알리바이만 찾을 뿐 스스로의 내면과 실력을 단단히 하는 일을 게을리 하기 쉽다. 그저 국민을 위해서 일하고, 진보와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면 왜 문제겠는가. 당연히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마음만으로 정당정치를 한다면 성과 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책임을 이해 못한 채, 세상 탓하고 제도나 환경 탓하는 것으로 일관하기 쉽다. 뜻대로 안 된다고 화만 내고 내용 없이 소리만 높이는 일만 반복하기 쉽다. 그런 무익한 정치인들이 양산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성과로 말하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만이 “변화의 정치학”을 이해할 수 있고 민주정치를 이끌 수 있다. 이번 강의가 그런 방향으로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7) 정치학의 출발은, 시민 개개인의 좋은 삶은 그들 모두에 공통된 문제를 다루는 정치가 좋을 때 가능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개인의 삶이 보람과 가치를 가질 가능성은 정치가 어떠냐 하는 문제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고대나 현대나 어느 시대든 최선의 정치체제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야말로 정치학의 최대 관심사였다. 미국 예일대에서 정치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스티븐 스미스 교수에 따르면, 그런 지식 내지 지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고대의 철학자들은 ‘에로스(Eros)’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좋은 질서, 좋은 정치, 좋은 공동체를 구현하고 그 속에서 좀 더 자유롭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에로틱한’ 활동으로 여겼던 것인데, 현대 민주주의에서라면 그런 “야한 일”은 좋은 정당 정치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추적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이번 강의가 그런 열정에 좋은 자극제가 되었기를 바라면서, 이제 모든 강의를 마친다. 다음에 더 멋진 강의로 다시 만나자. 모두들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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