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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강. 정당체계의 변화 2 : 왜 계층적/이념적 기반이 넓은 정당체계를 강조하나

 

 

 

 

4부. 정당 조직과 체계의 변화

 

31강. 정당체계의 변화 2 : 왜 계층적/이념적 기반이 넓은 정당체계를 강조하나

  

1) 31번째 시간이다. 그간의 강의에서 본 강사는 늘 정당체계의 “이념적/계층적 기반”의 문제, 달리 말하면 정치적 대표의 체계를 좀 더 넓은 이념적/계층적 기반 위에 올려놓는 문제를 강조해 왔다. 즉 노사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계층 간 분배와 흔히 좌우로 표현하는 이념적 분화가 정당체계 안에서 넓게 대변되는 정치가 가능해야 민주주의도 그 가치에 가깝게 실천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사회적 성취”에 주목하는 비교정치 분야의 조사 결과와도 어느 정도 양립한다. 오늘은 이를 단순화해서 살펴볼까 한다.

 

2) 어떤 민주주의가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할까? 이를 통계적으로 다루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투표율은 높고, 인권 및 자유화 지표도 좋으며,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 부여 정도도 높고, 여성 장관 비율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계층 간 기대 수명의 차이가 적고, 불법 약물 복용, 10대 임신, 10대 자살, 저체중아 출산율, 정신 질환 발병률, 영양실조, 비만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 즉 기회의 평등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강력 범죄율과 재소자 비율이 낮은 안전한 나라는 어디일까?

 

이밖에도 더 많은 질문을 제기하고 그 결과를 탐색해 볼 수 있는데, 아무튼 설득력 있는 결론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진보정당의 경쟁력(득표율과 집권 기회를 기준으로 볼 때)이 강한 나라일수록, 둘째는 노동조합의 조직율과 교섭능력이 강한 나라일수록 통계적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이념적?계층적 대표의 범위가 충분히 넓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관심과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될 수 있다. 진보 정당의 경쟁력이 낮아 집권의 가능성이 없는 민주주의를 “보수독점적 정당체계”라 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그 사회의 하층이나 약자 집단의 이해는 대표되기 어렵다.

 

3)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실천되고 있는데, 이때 그 사회의 민주적 성취는 노동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의 이익과 열정이 기업 운영과 노사 관계, 나아가 정당체제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노동의 시민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표출, 조직화 가능한 정치의 범위가 좁은 사회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정당체제 위에서 그저 정권만 교체되고 세력과 인물이 친박/비박이니 친노/비노니 하는 식으로 바뀐다고 사회가 좋아진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치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희망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함께 땀 흘려 일하며 협력하는 것의 가치가 근본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도 그런 사회를 상상해보며 개인 삶도 준비해가는 열정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노동 배제적인 권위주의적 문화로부터 벗어나 노동자도 기업도 경제 운영의 공동 협력자가 되는 것이 갖는 유익함을 향유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정치가는 정치가답고 기업가는 기업가답고 공무원은 공무원답고 교수는 교수답게 자신이 소명으로 삼은 일에 대한 헌신과 보람으로 좀 더 행복한 삶을 일궈갈 수 있을까? 이는 진보 보수를 떠나 어떤 정당이라도 책임감 있게 해야 할 고민이자 상상일 것이다.

 

4) 누구나 말하듯, 노동은 인간 공동체의 기초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땀 흘려 일하고 협동하는 것의 보람이나 가치가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다면 어느 인간 공동체도 행복할 수 없다. 중학생 나이만 되어도 몸은 다 자란 아이들에게 땀 흘려 함께 일하며 협동하는 노동의 가치는 가르치지 못하고 누가 더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가를 경쟁하게 하는 우리의 교육현실은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청소년들의 노동 환경은 더 문제가 있다. 이들의 노동은 협력과 공동체성을 배울 기회로 작용할 수 없는 조건, 달리 말하면 “노동배제적인 사회 문화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강제된 노동”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고 지내는 철도 기관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료 한 사람이 급하게 기차 정비를 하느라 땀범벅이었는데, 때마침 아이 손을 잡고 그 옆을 지나던 젊은 엄마가 아이를 멈춰 세우더니 “너, 공부 안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라던 것이다. 그 정비사는 어느 정도 고용이 안정되어 있는 공기업 소속에다 결코 소득이 적은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 노동자로 범주화된다는 것이 어떤 낙인의 대상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이렇듯 학교 교육의 현실에서건 사회 속의 노동 현실이든, 시민권의 한 내용이 되어야 할 노동의 가치는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노동자들 스스로 결사의 힘이 키우는 것과 함께 노동의 문제를 중시하는 진보적인 정당들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의 수많은 경험은 실증하고 있다.

 

5)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부키, 2011)의 저자인 토머스 게이건(Thomas Geoghegan)에 따르면, 노동의 가치가 중시되는지 여부는 사랑의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졸자의 90% 이상이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직업을 찾아야 하고, 실직은 곧 무보험자 및 모기지론 미납자로 전락할 위험이 큰 미국의 젊은이들이 연애 상대의 조건과 스펙에 신경을 더 쓰는 반면, 어려서부터 노동의 가치와 다양한 직업 교육에 익숙하고 성장한 뒤에도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는 유럽의 젊은이들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유럽 여성들이 사랑하고픈 남자의 순위에서도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느 회사에 다니는가보다는 키스 잘하고, 유머 있고, 요리 잘하는 남자가 더 높게 평가된다고도 한다. 개개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게 될 것인가의 문제마저도, 노동의 가치 내지 노동의 시민권이 얼마나 잘 실현된 사회인가의 문제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6) 게이건은 유럽에 비해 미국의 노동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강조했지만, 그러나 본 강사의 입장에서는 미국보다 한국의 노동문제가 훨씬 더 심각해 보인다. 적어도 미국의 노동자들은 우리보다 결사의 자유를 훨씬 더 충분히 누리고 있다. 미국 민주당이 노동조합의 요구를 무시하고는 아예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선거 시기 민주당 정치 자금의 절반 이상은 노동조합에서 나온다.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유력 정치인들이 서로를 “미국 노동자를 위한 투사(champion for working American)”라고 치켜세우는 사례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렇기에 200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미국 경제의 튼튼함을 억만장자의 숫자나 포천지(Fortune誌)가 선정하는 500대 기업의 이윤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도전정신을 발휘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경제, 손님의 팁에 의존해 살아가는 식당 여종업원이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내면서 실직의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경제를 튼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노동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경제를 강하다고 말한다.”

 

7) 우리는 어떤가? 노동문제를 말하면 뭔가 좌파적이고 운동권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2002년의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정권이 노동자의 기본권을 탄압하던 시절에 저는 노동자의 편에서 현장을 뛰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와 더불어 노동자의 권익이 신장된 후에는 노사화합의 중재자로 현장을 뛰었습니다. 기업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는 노동자들한테 계란세례를 받으면서까지 기업을 살리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집권한 뒤에는 어땠을까?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에 대해서는 관대한 반면 노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노동문제는 권위주의 때에나 관심 가질 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기업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도 노동 문제가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8) 게이건도 강조했듯이, 어느 사회든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노동이고 그 핵심은 노동시간에 있다. 노동시간이 짧은 사회가 될수록 노동의 가치가 더 튼튼해진다. 그런 사회일수록 더 건강하다. 일에 대한 헌신성도 높다. 책이 많이 읽히는 나라도, 종이신문의 발행부수가 많은 나라도 이런 사회다. 많은 사람들이 출판계의 오랜 불황을 염려하는데 다른 어떤 정책보다도 장시간 저임금 노동체제를 개선하는 것이 최고의 출판진흥책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진보든 보수든 누가 더 노동문제 개선에 유능한지를 두고 경쟁해야 한국 민주주의가 좋아진다고 본다. 그래야 인간다운 교육도 가능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우리 같은 출판업자들도 산다. 노동문제, 진짜로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그런 노동시간의 문제를 누가 개선해갈 수 있을까? 개별 기업 경영자가? 개별 노조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산별체계 이상의 집합적 노사관계의 의제가 되어야 할 것이고, 아마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노동정책, 산업정책, 경제정책의 변화가 동반되는 것 없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누가 이 영역을 이끄는가? 당연히 입법과 공공 정책의 범위에서 활동하는 정당의 힘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당체계의 계층적/이념적 기반을 넓히는 과제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9) 끝으로 조금 이질적인 주제, 그러나 흥미로운 문제 하나를 이야기할까 한다. 수강자 가운데 한 사람이 본 강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최근 국회의원 출판기념회가 부당한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는 수단이 되고 있기에 금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많은데, 출판업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출판업자로서보다는 민주주의에서 “돈과 정치의 문제”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우선 대중정치는 돈을 필요로 한다는 객관적 사실과, 검찰과 언론 등 “반정치 이데올로기의 동원자들”은 이른바 “반부패 담론”을 통해 정치에서의 돈 문제를 즐겨 악용한다는 사실은 구분되어야 한다.

 

10) 지배이데올로기의 한 유형으로서 “반부패 담론”은 돈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도덕주의적 태도를 동원해 힘을 발휘한다. 그들은 “돈 안 드는 정치”를 앞세우며 정치 자금 자체를 불법과 부도덕의 원천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돈은 중요하다. 본 강사는 평생 돈 걱정하면서 살아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보통 사람들 모두가 그럴 거라고 본다. 가끔 “너무 돈, 돈 하지 말라”거나 “돈의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라”라는 사회 명사들의 질타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거부감이 든다. “돈 = 타락”으로 여기며 “돈 안 드는 정치”를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돈과 정치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못 보게 만들 때가 많다.

 

돈은 대규모 사회의 경제활동과 교환행위를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유용한 수단이다. 바퀴와 책과 함께 돈, 화폐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이다. 돈이 없다면 어느 사회든 경제적 대혼란 그 자체로 퇴락하고 말 것이다. 돈은 권력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악용될 가능성을 줄이는 한편 어떻게 선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지, 막고 없애는 것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어느 분야의 사회 활동도 경제적 측면을 갖고 있고 따라서 돈이 필요하다. 정치도 당연히 그렇다.

 

11) 민주정치에서 필요한 돈 문제 내지 재정 충당의 원리는 “정치적 평등”을 그 기준으로 한다. 이는 두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① 첫째,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때문에 개인 삶이 희생되지 않게 해야 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참여하고 조직하는 그 모든 것에는 비용이 든다. 그런 일에 참여하는 것이 가난한 시민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부담이 된다면 당연히 정치적 평등의 가치는 실현될 수 없다. 결국은 돈의 여유가 있는 부자들에게 유리한 정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든 정치에 참여하는 것 때문에 개인 삶이 희생되지 않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하고, 사실 이게 민주주의이다. ② 둘째,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돈이 말하는 것(money talks)” 즉, 돈의 영향력으로 정치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돈을 가진 사람이 정치에서 불평등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본 두 차원을 요약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문제의 핵심은, 돈이 정치에 유입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된 돈이 정치적 평등의 원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그 사용과 결과를 통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돈을 막으면 부자와 귀족만 정치하게 될 것이란 점은 정치의 가장 오래된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민회 참여자에게 일당을 지급했다. 차티스트 운동 때는 대표에게 세비를 주라고 요구했다. 세비는 보통선거권과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민주주의 제도이다. 세비나 관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가난한 시민은 정치에 의존해 살 수가 없고, 당연히 정치는 다른 부유한 시민들의 몫이 된다. 노동조합이 정치헌금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같은 원리라 할 수 있다. 돈을 집단으로 걷어 낼 수 있어야 돈의 불평등성을 줄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집단으로 모여야 하고, 그래서 개별적으로 약자의 지위를 상쇄할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12)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무작정의 “반부패 담론”을 동원하고 돈의 유입 자체를 부정시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돈을 집단으로 걷어 내는 것을 막은 것은 가장 큰 문제이다. 집단으로 헌금하면 로비의 가능성이 많다는 게 정당화 논리이다. 그런데 돈을 걷어 내는 것은 당연히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못하게 하면 개별로서의 시민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정치의 방법으로 수정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단체나 집단으로 정치헌금하게 하면 경제력이 큰 사람들이 보수 쪽에 더 많은 돈을 모아 줄 것이라는 주장에 직면할 때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경제적 강자들은 절대로 정치의 방법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곳은 평등한 시민권이 작용하는 곳이고, 따라서 그들은 늘 정치를 축소시키고 사적 영역에서 싸우려 한다. 그들이 강자인 곳은 정치 밖 사적 영역이니까 그렇다. 사회 상층들이 집단과 단체로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것? 결코 그들이 원하는 일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당연히 사회 약자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그래야 약자들은 더 큰 수의 집단으로 공적 영역에 참여할 유인이 강해질 것이기 때문인데, 이런 일을 사회 속의 강자집단을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집단을 만들고 조직을 기워가는 것이야말로 언제든 사회 중하층들이 향유해야 할 최고의 무기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평범한 기초 이론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13) 선거운동에 제약이 많아진 것도 일반 유권자와 접촉하면 돈의 유혹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이루어졌다. 민주주의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대중과 정치를 단절시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돈과 부패의 문제를 없애기 위해 민주주의를 축소시킨다? 이게 옳은 접근일 수는 없는데, 그간 정치 개혁의 거의 모든 것이 이런 식이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투표하는 것 이외에 일반 대중이 할 수 있는 정치 참여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대중적 선거운동, 대중적 선거참여, 대중적 정치 헌금 모두가 막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가난한 보통 시민들이 가진 수단은 수의 힘인데, 그 힘을 사용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대중이 참여보다는 여론동원의 수동적 대상이 될 때 어떤 일이 나타나게 될까? 다수의 사람들을 움직여 표와 돈을 조직할 방법을 없애버리면, 선거 경쟁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대규모 비용이 요구되는 여론조사나 홍보 기획에 의존하는 정치만 심화될 수밖에 없다. 노동 집약적 정치 대신 자본 집약적 정치를 과대 성장시켜 버렸는데, 이런 정치를 좋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런 조건에서 누가 정치할 수 있었겠나? 당연히 돈이 있거나 아니면 돈을 동원할 능력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신종 금권정치”가 지배하게 된 것인데, 가난한 사람은 이제 정치할 수 없는 환경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교육받은 중산층 이상의 엘리트들에 편중된 오늘의 국회 모습은 이로부터 기인한다. 민주정치에서 돈을 부패나 부도덕의 원천으로 간주해 없애려고만 하면, 결과는 이상해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14) 다시 국회의원 출판기념회 문제로 돌아가 보자.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기 위해선, 우선 정치에서 필요한 돈을 다수의 소액 기부자들이 집단의 이름으로 걷어 낼 수 있는 조건부터 먼저 따져야 한다. 개개인이 돈 내면 되지, 왜 꼭 집단이냐고 하겠지만, 돈 내는 것? 자발적으로? 그게 쉽지 않다. 어떤 형태로든 시간과 비용이 든다. 누군가 그 비용을 대신해서 더 넓게 걷고 그들의 목소리를 정치 영역 전반에 넓게 투영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오로지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돈을 낸다? 현실을 모르는 일이거니와, 민주주의 이론에도 반한다. 왜 우리는 조직을 만들고 집단을 결성하나? 참여의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다. 그걸 못하게 하면 당연히 기존 사회적 불평등 구조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정치를 위해 필요한 돈을 대중적으로 조달할 입구를 막은 채, 출판기념회를 통해 재정 마련을 하는 “귀여운 편법”마저 못하게 한다면 글쎄, 그걸 막고 안 막고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뿐더러, 기존의 반부패 담론 그리고 그에 근거를 둔 정치자금법 등 불합리한 관행과 법만 정당화해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자금법? 문제가 많다. 노조를 포함해 돈이 공개적으로 정치에 투입될 수 없는 지금의 구조에서 무슨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15) 돈은 필요한데, 돈의 유입 통로를 좁히고 막으면, 역설적이게도 돈의 가치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최대 향유자는 자금 동원력이 큰 집단일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나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출판기념회 하나만 놓고 부정부패를 말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검찰과 언론 등 “반부패 담론 동맹”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자 민주적 정당 정치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상습 전략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기업의 회계를 더 투명하게 하고, 부처나 공공 기관들이 정치인들의 책을 구입하느라 동원한 편법을 막고, 혹 정치인들의 책 내용이 부실하다면 그걸 비판해 개선하게 하면 될 일을, “정치 = 돈 = 부패”를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를 사회로부터 유리된 무균질의 실험실 안에 가두는 일에 열을 올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

 

16) 가난한 보통의 시민들도 정치를 통해서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야 민주주의도 좋아진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은 더 넓어져야 하고, 당연히 참여의 한 방법은 액수는 많지 않더라도 집단으로 걷어 그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다. 그래야 가난한 보통 시민들도 자신들의 이익과 열정을 대변할 정치 세력을 키울 수 있고, 그래야 시민으로서 효능감도 키울 수 있다. “검찰적 관점의 반부패 담론”이 지배하도록 방치하면, 노동집약적 대중정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돈의 불법성은 줄지 모르나 불평등한 돈의 위력은 더욱 커질 뿐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돈의 필요만 커진다. 이 점을 다시 강조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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