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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강. 대의 정치에 대한 잘못된 이해 : 촛불지상주의론

 


 

4부. 정당정치에 대한 이해와 오해

 

23강. 대의 정치에 대한 잘못된 이해 : 촛불지상주의론

 

 

2월 10일 오후 4시, 박상훈 학교장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정의당 중앙당 회의실에서 만납시다.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
박상훈 학교장님께 직접 질문하세요! 

 


 

1) 23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2008년 촛불 집회 당시 풍미했던 정치관을 불러 들여, 우리가 반드시 익숙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구조와 특징을 한 번 더 살펴보겠다.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17일 과거 진보신당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본 강사는 “촛불 집회와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었다. 그때는 정당정치나 대의제에 대한 야유가 최고조에 달했고 당연히 직접 민주주의와 “광장 민주주의” 등이 대안으로 이야기되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흥분 상태였고, 그 자리에서 본 강사의 이야기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은 촛불집회를 신화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당시 “다함께”로 불리던, 자본주의 경제체제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정치체제도 변혁하고자 했던 운동권 그룹이 있었는데, 본 강사의 발표를 증오에 가깝게 비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웃음). 하지만 본 강사 스스로는 부정적 반응을 감수하고 했던 그때의 주제 발표를 한 것에 후회나 미련은 없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도 하기를 잘했다고도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보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하면 촛불 집회에서 나타난 시민적 열정과 에너지를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진짜 살펴졌어야 할 문제의 초점은 여기에 있었다는 생각이었다. 그 점에서 도대체 현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말할 기회로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당시의 그런 문제의식과 발표했던 내용을 다시 말해보겠다. 발표 시작부터 본 강사는 촛불집회에 대한 신화화된 해석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2) 과장된 해석과 신화 : 촛불 집회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보다 보면, 촛불 집회를 누가 더 높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실제 현실의 여러 측면이 획일화되고 과장되고, 나아가서는 신화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향이 커졌다. ‘위대한 시민’과 ‘대중의 놀라운 창발성’ 등을 거론하는 사람 중에는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결과를 두고 시민의 보수화와 욕망의 정치에 포획된 대중을 이야기했던 사람도 있다. 황우석 사태 때에는 과학 이데올로기에 동원된 대중을 비난했고, 5?18 때가 되면 ‘위대한 광주 시민’을 이야기하다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의 노예가 된 유권자’를 질타했던 사람도 있다. 시민 대중, 유권자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따라서 분석의 독립적인 단위로 단순화되면 상황 논리에 종속되기 쉽다.


촛불 집회의 새로움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민운동, 새로운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과장도 심했다. 시위에서 나타난 여러 아이디어들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 속에서 발전해 왔고, 촛불 시위도 크게 보면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위 방법의 새로움을 과장하는 해석이, 그간 사회운동의 다양한 시도와 발전에 대해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새로움의 발견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흥분은 이를 통해 사태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바도 크다. 그러다 보니 실제 현실과 신화화된 해석 사이에 격차는 컸다.


촛불 집회를 아날로그 정치 대 디지털 정치, 근대적 정치 대 탈근대적 정치, 전통적 정당 정치 대 참여적 생활 정치 등 과격한 이원론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사태의 구조가, 부정적이고 낡은 것으로 묘사된 아날로그 정치, 근대적 정치, 정당 정치 때문으로 환원되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안을 디지털 정치, 탈근대적 정치, 참여적 생활 정치처럼, ‘개념으로 치환된 추상적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사태를 신비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 밖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무책임하게 강요되는 현상이다. 사태의 원인을 대의민주주의 때문으로 환원하는 해석, 제도 정치 내지 정당 정치에 대한 부정, 여러 형태의 반정치주의적 경향들, ‘새로운 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등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 정치관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벗어나는 주장들이 아무렇게나 이야기되는 것은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 촛불 집회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해석하거나, 대의민주주의를 나쁜 민주주의의 유형으로 이해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해석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들을 실망시키겠지만,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다. 과거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사례를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사실 직접이냐 간접이냐를 떠나, 3만 명 정도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의 민주주의 모델을 대안으로 보는 것은 그야말로 복고적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민회에서 논의할 의제를 준비하는 ‘5백 인 위원회’에 보낼 대표를 뽑았다. 이를 위해 아테네를 트라이브(tribe)라는 10개의 광역지역으로 나누었고, 대표를 뽑는 지역구를 데메(deme)라고 불렀다. 그리고 140개로 이루어진 이 데메와 그 구성원인 데모스(demos)가 중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체제를 데모크라티아(d?mokratía), 즉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추첨으로 대표를 선출했다는 점이 특별했지만 대표라는 현상 자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마이다. 또한 모두가 추첨으로만 뽑힌 것은 아니다.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장군은 추첨이 아닌 선거로 뽑혔고, 유일하게 연임이 가능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끈 정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추첨이 아닌 선거로 선출되었다. 그는 23년간 매년 선출된 것으로 유명하다.


귀족과 명사들만의 의회정을 유보 없이 비판한 레닌이 구상한 사회주의 정치체제 역시 대의민주주의였고, 실제 실현된 소비에트라는 대의제 역시 발칸 문제에서 민족?인종?언어?종교적 대표성을 해결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구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체제의 한 유형으로서 직접민주주의는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의 민주주의는 모두 대표를 뽑고 그에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스위스에서와 같은 주민 투표나 주민 발의, 주민 소환 제도를 말하거나 미국의 오랜 전통인 타운 홀 미팅 등을 강조하면서 직접민주주의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런 제도들이 실제로는 감세 정책을 압박하고 의회를 통과한 외국인 국적 부여 법률을 무력화시키는 등 보수적 결과를 낳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신화화된 비판에는 “사악한 정치가 (내지 파당적 이익에 골몰하는 정당) 대 선량한 시민”의 가정, 즉 시민이 자신의 문제를 직접 다룰 수 있으면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정치학의 출발은 좋은 정치를 통해 좋은 시민을 만드는 문제에 대한 것이지, 좋은 시민에게 좋은 정치의 책임을 묻는 데 있지 않다. 과거나 지금이나 좋은 통치자를 뽑는 것이 정치의 중심 문제이지 시민이 직접 정치를 책임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의 위대함을 수백만 번 말한다 해도 현실의 정치적 대표 체제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대표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이 하층 배제적이고 상층 편향적인 민주주의는 개선되기 어렵다. 촛불 집회에 나타난 민주적 열망을, 어떻게 정당 체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전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정치는 권력의 문제를 핵심으로 하면서 억압과 통제, 갈등과 음모, 전략과 이해관계, 부패와 타락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불가피하게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선용될 수 있는 정치의 구조와 체계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핵심이지, 현실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알리바이로 반정치주의를 부추기고 동원할 일이 아니다.

 

 


4) 대규모 운동과 보수 독점의 정치 : 촛불 집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갖게 된 특정의 패턴 내지 악순환의 구조를 해체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운동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 운동의 에너지가 민주화 이후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민주화 이후 체제의 형성은 구체제에 기원을 둔 보수적 정치 세력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가 다시 등장했고, 이것과 사회적 요구 사이의 괴리는 계속되었다. 간혹 정권 교체의 과정에서 야당과 운동의 에너지가 접합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실망의 사이클로 이어졌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을 만들어 낸 원천이다.


1990년과 1991년의 5월 정국, 1997년의 총파업, 2000년의 총선시민연대, 2002년의 촛불 정국, 2004년의 탄핵 정국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대규모 운동의 개입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정치의 세계에서는 보수 독점의 정당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강렬했고, 선거 때마다 정치 엘리트 교체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으며, 새로운 정당의 등장과 소멸이 반복되었지만 구조와 제도로서 정치의 보수성은 변화되지 않았다. 재벌에 대한 비판이 거세고, 재벌 총수가 개인적으로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는 더욱 강고해진 과정과 유사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갖는 이런 패턴 때문에 한편으로 보수 독점의 체제는 그대로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 운동의 분출과 대규모 항의의 표출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리거나, 반대로 어떤 변화도 불가능할 것 같은 교착 국면이 지속되다가도 갑작스럽게 상황이 급변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이런 순환 구조에서 동원과 열망의 주기를 경험하게 되면 한국 정치는 ‘변화와 역동성’의 상징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탈동원화와 실망의 주기로 돌아선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 정치는 ‘정체와 퇴행’을 특징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말하려는 요점은, 한국 정치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은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현재와 같은 정당 체제를 그대로 둔 채 반정치적 열정과 도덕적 호소로 운동의 지속만을 강조하고 풀뿌리 생활 정치와 새로운 민주주의론을 제아무리 불러들인다 해도 그간의 악순환 구조가 그대로 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하에서 운동을 통해 정치체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이 위험하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했듯, 민주주의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다. 실망스럽겠지만, 민주주의는 큰 변화를 잘 허용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매우 강고한 제도적 정당화의 원리를 갖는다. 권위주의에서 정권 퇴진 운동이 갖는 정당성과는 달리, 민주주의 체제에서 운동을 통해 민주적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경우 이에 대한 반작용 내지 반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운동은 자발적 항의의 표출이며 민주주의를 활력 있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정치체제의 운명을 결정할 국민적 위임과 같은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자유로운 의견의 조직화와 항의의 표출을 통해 정부의 일방적 통치행위를 제어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대안적 정치 세력의 성장을 통해 정치적 대표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5) 촛불 집회와 민주주의 : 많은 사람들이 ‘운동이냐 정당이냐’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문제를 토론하고자 하는데, 이는 잘못된 질문이고 잘못된 기준이다. 정당은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중심적이고 또 필수적인 요소다. 따라서 어떤 정당, 어떤 정당 체제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이다.

 

그러나 운동은 민주주의 체제 여부를 정의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며, 운동이 민주주의와 접맥되는 차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운동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서 정당과 정당 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지표는 되겠지만, 운동으로 정치체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운동이라는 용어를 도덕화하고 민주주의의 문제를 이러저러한 운동론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는 보수 독점적이고 노동 배제적인 현실의 정당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어렵다.


불행하게도 어느 정당도 촛불 집회 과정에서 정당으로서의 권위나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시위 참여자들이 기존 정당에 기대를 갖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촛불 집회에서 나타난 민주적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정치의 악순환 구조를 강화하는 보수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경멸받을 일은 대중의 에너지를 허비하는 일이라 말한 적이 있다. 촛불 집회를 신화화하는 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끝내지 말고, 바로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실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정치에서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광장의 촛불 집회 그 자체에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묶어 두려는 것, 대중을 선거와 정당, 의회와 같은 정치의 세계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것, 그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민주주의, 집권할 수 없는 민주주의, 정치라는 가능성의 세계를 버리고 갈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실제로는 가장 강력한 보수적 정치관으로 기능하기 쉽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6) 이상으로 당시 본 강사의 발표 내용을 다시 살펴보았는데, 다행으로 느끼는 것은 당시 어떤 정당보다도 진보신당이 촛불집회에 당의 깃발을 당당하게 들고 참여했고, 그러면서 신규 입당자들이 줄을 이었다는 사실이다. 촛불 시민들은 반정당주의자들이 아니라 정당다운 정당을 기대했다는 점을 실증하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다른 정당들도 진보신당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나서야 했다. 자신의 정당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정당은 언제든 성장의 기회를 갖는다고 믿는다. 이 말을 끝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친다. 모두들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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