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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정당 정치의 원리와 역사

13강. 현대판 호민관으로서 정당

1) 13번째 시간이다. 지난 11강과 12강에 이어 오늘 강의도 “나는 왜 정당정치를 옹호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다만 주제랄까 아니면 초점이랄까 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난한 보통사람들을 위한 호민관은 정당일 수밖에 없다”는 테제를 좀 더 구체화해 보는 데 있다.

강의 내용이 자꾸 길어지는 것 같아 오늘은 정말 짧게 끝내겠다(웃음). 이론적인 주제도 최소화해서 말하겠다. 사실 어느 정도는 앞서 말한 바 있기도 하고, 다음 시간에 조금 심각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2) “강한 정당이라야 가난한 시민을 보호할 수 있다.” 오래전 경향신문에 쓴 칼럼 제목이기도 하지만, 본 강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강조점을 좀 더 넓게 해서 말한다면, 정당이 제대로 잘 해야 다수의 시민을 구성하고 있는 중하층을 보호할 수 있고, 또 그래야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먼저 왜 가난한 시민을 말하는가? 그건 민주정치의 존재 의의 그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보통사람들이 온정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그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것이 아니라면 민주정치를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백성에 대한 온정은 군주정도 못지않았다. 다만 선한 왕이 있을 때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에 반해 민주주의는 시민 개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민주주의를 하되, 제대로 잘 했으면 좋겠다. 민주주의에서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면, 그 어떤 사회 원리나 경제체제도 가난한 시민들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 능력 본위의 사회를 만든다 치자. 그래도 교육과 직업적 성취에 따른 차등 대우는 불가피하다. 시장경제가 더 공정해졌다고 하자. 그래도 1원1표의 원리는 유지될 것이다. 계급 지배의 폐지를 내건 공산주의는 어떤가. 민주정치는 부정되었고 보통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더 억압받았다.

4)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지만, 그 가운데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정의는 흥미롭다. 그는 민주정을 ‘빈자(貧者)의 지배’라고 정의했다. 본 강사는 그의 정의야말로 문제의 핵심을 때린 것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그건 민주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만인의 평등과 복지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앞세워야지 왜 가난한 보통사람에 편중된 주장을 하냐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과도한 보편적 접근이 때로 공허할 수가 있다. 불평등 문제가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오늘날과 같은 현실이 만들어진 것은 보편적 가치를 덜 말해서가 아니다.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비정규직 보호 등등 아마 그간 나온 구호만 생각하면 우리사회는 벌써 오래 전에,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이자 비정규직 없는 평등한 경제체제를 가진 사회가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박근혜 후보에서 박근혜 정부로 옮겨가는 사이 경제민주화 주장이 어떻게 귀결되었나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오히려 그런 공허한 구호는 현실을 호도하는 기능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과 같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사회 현실을 만나게 된 것은 복지와 경제민주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덜 외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는 정치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이다. 본 강사는 이것이 더 구체적이고 더 정확한 설명이라고 본다.

5) 사실 민주정치가 가난한 보통사람들에 비해 중산층 시민들의 삶을 보호해야 할 이유는 크지 않다. 그들의 경우는 경제와 교육,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의 삶을 지킬 자산과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번 선거를 거듭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한국 정치가 점점 더 “중산층 편향적이고 하층 배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어떤 정치세력도 이른바 “민중적 의제”를 중시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민생”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집권당이 야당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하는 정치 언어가 되었다.

야당이나 진보정당들 역시 “의식 있는” 중산층 정당처럼 보일 때도 많다. 그들의 생각이 덜 민중적으로 보수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 개개인이 가진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조직의 문제이다. 즉 가난한 보통 시민들의 세계 속에서 야당과 진보정당의 대중적 조직 기반이 몹시 약화된 것, 문제의 원인과 대안은 알아도 이를 현실화시킬 수 없을 만큼 당의 조직적 능력이 약화된 것, 당원이나 지지자의 참여에 의존하기보다는 무정형적인 여론 동원의 정치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 것, 그러다보니 조직으로서 정당보다 이미지 자산을 크게 가진 엘리트 후보에 의존하는 정치가 된 것에 있다.

결국 우리의 민주정치는 대중 ‘속’을 떠나 대중 ‘앞’으로 자리를 옮겼고, 시민은 주권자도 아니고 대중조직의 일원도 아닌 구경꾼이 됨으로써, ‘청중 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라는 말이 어느덧 현실을 더 잘 묘사하는 개념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정치에 참여해 의견을 표현할 여가와 능력을 가진 집단은 누구겠는가? 당연히 교육받은 중산층이지 보통사람들은 아니다.

6) 현대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와 관련해 핵심 테제가 될 만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본 강사는 정치학 분야에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저서를 연달아 내놓고 있는 로위와 진스버그의 주장을 들겠다. 그들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에서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은 이렇다.

“강한 정당의 부재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위축시키고 선거를 중간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Theodore J. Lowi & Benjamin Ginsberg, American Government: Freedom and Power, 2002, W. W. Norton & Co., 253~254쪽).

이는 교육 자산이나 직업 및 소득 자산이 약한 가난한 보통사람들을 위해 참여의 비용을 낮추고 조직화의 비용을 감당해주는 강한 정당이 없다면 민주정치는 계층 간 불평등을 줄이기보다 증폭시키는 확성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정당들이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실제 세계 속에서 더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야당과 진보정당들의 조직적 능력은 어떻게 하면 강화될 수 있을까. 여전히 한국정치가 집중해야 할 과제는 여기에 있다.

7) 수강자 가운데 한 사람이 본 강사가 사용하는 “교육받은 중산층”이라는 표현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 “그들 위주의 정당이 되는 게 왜 문제인가? 모든 정당은 중산층의 지지를 얻어야 집권하지 않나?” 아마도 질문자는 중산층을 중간계층 혹은 중간계급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그 규모는 어떤 기준으로든 경제활동인구의 60% 안팎이 될 텐데,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 위주의 정당 혹은 그들도 고려하는 정당이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본 강사가 중산층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다르다. 우선 “중산층(中産層)”이라는 용어 그 자체부터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만든 말이고, 영어로도 옮기기가 애매하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한국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민주화를 유보하더라도 빠른 산업화를 잘 감내해 준다면 사회구성원 다수의 경제적 처지가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갈 거라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당시 산업화를 주도했던 경제기획원은 중산층의 기준을 “소득이 최저생계비의 2.5배가 넘고, 자가 또는 독채 전세의 주택을 가졌으며 안정된 직업이 있고, 고졸 이상의 학력”으로 정하기도 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중산층이라는 용어의 핵심은 “재산과 교양을 갖춘 서구적 시민”, 즉 부르주아지에 가까운 이미지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본 강사는 중산층 혹은 교육 받은 중산층이라고 할 때 그것은 교육을 통해 신분이 상승되고 소자산가 이상의 재산을 갖게 된 “사회 중상층”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지 않고, “중간값 소득의 50~150% 혹은 75~150%에 해당하는 계층”과 같은 기준으로 환원해버리면 우리사회는 그야말로 다수가 중산층인 사회가 되어 버리는데, 이게 무슨 현실을 반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주관적 계층위치를 질문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해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난센스로 생각한다. 글쎄, 자신이 하층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드는, 그런 허위의식을 품게 하는 조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본 강사가 중산층이라고 할 때 그들은,“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부자로 성공한 자영업자”, “국가고시를 합격한 관료”, “대기업 취업을 통과한 집단”, 나아가 교수, 의사, 기자, 변호사 등을 포함해 “자격시험을 통과해 영향력 있는 전문가 집단” 등이 중심이 되는 계층 혹은 그런 계층을 향한 열망을 가진 예비 집단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수성가와 부모로부터의 유산만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입학한 교육 자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교육받은 중산층”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결론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간 계층이나 중간 계급이라면 정당들이 그들의 열망과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본다. 특히 진보정당을 포함해 야권이라면, 중간 계층의 절반 정도와 그 아래 서민 내지 민중을 포괄하는 “사회 중하층”의 이해와 열망을 대변하고자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간 한국정치는 점차 사회 중상층에 편향된 정치를 해왔다고 본 강사는 생각한다. 그리고 중산층 위주의 정치라 함은 이를 잘 나타내 주는 한국적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해왔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오해는 풀렸으리라 보는데, 더 이야기해야할까? (웃음)

8) 이상으로 오늘 강의를 마친다. 다음 시간부터는 정당정치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시민정치론”과 “국민후보론”, 그리고 “전문가주의”를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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