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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9. 7월 14일 <민주주의의 ‘(재)발견’>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와 ‘유럽 민주주의의 성쇠’와 ‘대한민국 집권당의 민낯’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7월 14일 ‘오늘’은 <민주주의의 ‘(재)발견’>이라는 주제 아래 ‘박근혜 정부와 인권의 후퇴’와 ‘유럽 민주주의의 성쇠’, ‘대한민국 집권당의 민낯’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박근혜 정부와 인권의 후퇴>는 ①‘보호감호’ 조치 일부 위헌 결정(1989년)과 박근혜 정부의 보호수용법안 국무회의 통과 ②<2014/2015년 국제앰네스티 연례보고서>와 한국 인권의 ‘후퇴 경향’ 등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인권 경시에 대해 고발한다. <유럽 민주주의의 성쇠>에서는 ①프랑스혁명 기념일 ‘바스티유 데이’(Bastille Day) ②나치 독일의 1당 독재체제 구축과 ‘단종법’ 공포(1933년) ③‘제2인터내셔널’ 창립(1889년)에 대해 말한다. <대한민국 집권당의 민낯>에서는 ①‘날치기 통과’ 민자당(1990년) ②‘비리 전시장’ 새누리당 제3회 전당대회(2014년)에 대해 살펴본다.


1. 박근혜 정부와 ‘인권의 후퇴’

 

1) 1989년 7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보호감호’ 조치에 대해 적법절차 위반과 과잉금지의 원칙 등을 근거로 일부 위헌 결정을 내렸다. 보호감호란 사회보호법에 의거한 보호처분제도 중 하나이며 재범 가능성이 있는 피고인에 대하여 교화 및 사회복귀를 위한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보호감호시설 수용 처분을 내리는 것이다. 상습범, 집단범을 대상으로 하며 보호감호 선고를 받으면 보호감호시설인 청송감호소에 수용되고 사회복귀에 필요한 직업훈련을 받게 된다. 보호감호의 기간은 7년을 초과할 수 없다. 형 집행 후에도 범죄자를 일정 기간 격리 수용함으로써 재범을 막고 사회 적응을 돕겠다는 취지로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이다.

 

사회보호법은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뒷받침하기 위해, 삼청교육대에 끌고 간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1980년에 제정된 법이다. 즉 입법 제정 당시 이른바 ‘삼청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급 적용하여 보호감호를 실행한 것이다. 사회보호법은 권위주의 시절 독재정권에만 쓸모가 있던 대표적인 반인권 악법이었다. 보호감호 근거조항인 사회보호법에 대한 이중 처벌적 기능과 격리 위주의 운용 실태 등 인권침해, 법 제정의 절차적 정당성 결여 등 논란이 계속되었고, 결국 2005년 사회보호법이 폐지됨에 따라 보호감호제도도 폐지되었다.

 

보호감호제도가 폐지된 지 10년이 지난 2015년 3월 31일. 박근혜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보호수용법’ 제정안을 통과시켰다. 연쇄살인범과 아동성폭력범, 상습성폭력범 등 흉악범의 경우 형기를 마친 뒤에도 최대 7년간 특정 시설에 ‘보호수용’해서 재범을 방지하겠다는 취지다. 그런데 이 제도는 폐지된 보호감호제도와 상당히 닮은꼴이다. 형기 만료 뒤에도 대상자를 계속 가둬둔다는 것은 이중처벌이자 인권침해라는 비판이 입법예고 단계부터 있었다는 점에서도 보호감호제도와 비슷하다.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는 대상자를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보호수용이 보호감호와는 전혀 다른 제도라고 강변하고 있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마다 법무부가 늘 하는 소리이며, 흉악범죄에 대한 시민의 공포를 이용해 일단 제도를 시작하려는 꼼수다. 여론의 관심이 약해지면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 곧바로 그 대상을 확대해버리는 것이다. 새로 만드는 게 어렵지, ‘미끄럼틀의 원리’로 인해 이미 만들어진 법과 제도에서 그 대상을 좀 더 넓히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사실 예단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위험 때문에, 죗값을 치른 사람을 다시 처벌하는 것은 민주사법의 원리에 맞지 않다. 그럼에도 단 한 차례 열렸을 뿐이지만, 공청회에서 나온 ‘과잉 처벌, 자의적 판단 우려’ 의견은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보호수용법 제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에도 법무부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 전략으로 일관했다. 법무부의 시곗바늘은 다시 10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전두환의 부활 ‘보호수용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법무부는 2013년 한 해 동안 살인범죄가 966건이나 벌어지는 상황이니, 뭔가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2013년에 벌어졌다는 살인범죄 966건은 예비, 음모, 미수 등 ‘살인’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범죄를 모두 합한 것이다. ‘진짜’ 살인사건은 354건이었다. 위험을 세 배나 과장한 거다. 이렇게 위험을 과장하고, 공포를 동원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이 뭘까? 더 많은 인력과 예산, 그리고 권한을 챙기는 것 말고, 떠오르는 게 없다. 결국은 또 밥그릇이 문제다.”


2) <2014/2015년 국제앰네스티 연례보고서>는 2014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의 전 세계 160개국의 인권 상황을 담고 있다. 세계적 인권보호 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보고서를 통해 박근혜 정부 이후 한국에서의 인권이 “후퇴하는 경향”(regressive trend in the realization of human rights)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2008년 이후 국제앰네스티가 연례보고서에서 경찰력 사용, 국가보안법 자의적 적용, 국가인권위원회 독립성 훼손 등 구체적인 인권 사안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으나, 인권 후퇴 경향에 대해 이렇게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연례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북한과의 정치적 대결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통해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뿐만 아니라 위협, 구금 등을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2013년 129명의 국가보안법 적용과, 2014년 전반기 동안에만 30여 명의 국가보안법 위반 기소가 빈발한 것은 한국 국민들의 인권이 심각한 위협에 처해있음을 보여준다고 보고서는 언급했다. 국제앰네스티는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을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권 문제들 중의 하나”라고 묘사한 바 있다.

 

나아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기초적 민주주의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고서는 말하며,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로 대다수가 학생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한 후 재난 대응의 효율성과 사건 조사의 공정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우려를 제기했다. 철도 노조의 파업, 그리고 전교조를 불법화한 정부의 결정에 대해서는, 자유가 거부당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해됐다고 말했다.


※ 박근혜 후보의 2012년 대선공약자료집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 있는 변화>를 보면 인권 관련 공약은 ‘북한인권법 제정’ 딱 하나뿐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에 대한민국 인권 문제는 대통령에겐 이미 실종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인권이 대통령을 선택하는 가장 옳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권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대전제 위에서 ‘상생’의 삶을 추구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2012년 9월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이 펴낸 <대선 독해 매뉴얼>에 적혀 있는 글귀다. 대통령 선택 기준으로 ‘인권’을 포기한 나라 대한민국. 자업자득인가, 2015년 오늘도 대한민국 인권은 계속 후퇴하고 있으며, 추락하는 인권 속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가고 있다.

 


2. 유럽 민주주의의 성쇠

 

1) 7월 14일은 ‘바스티유 데이’(Bastille Day), 프랑스혁명 기념일

 

프랑스에서는 1880년부터 해마다 7월 14일을 ‘바스티유의 날’로 지정해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1789년 7월 14일은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날이다. 프랑스혁명은 오늘날의 근대 민주주의가 비로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다수의 참여를 통한 다수의 판단이 소수 귀족이나 절대군주에 의한 판단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증하게 보여주면서 구시대의 낡은 지배의 전통은 깨지기 시작하였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게 된 배경에는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이라 불리는 특권적 지배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주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왕정과 소수의 성직자 그리고 귀족이 거대한 특권을 매개로 결탁한 체제였다. 절대왕정은 한 때 유럽에서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전쟁의 수행과 궁중 사치 그리고 특권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민생고와 재정 위기, 사회 불평등 심화라는 현상을 점차 고착화시켰다.

 

프랑스를 위협하던 재정 위기는 1789년에 이르러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해져 파산 직전이었다. 정부 재정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세금의 추가적 징수가 불가피했다. 이에 루이 16세는 그동안 과세가 면제되어온 제1신분과 제2신분에 대한 과세를 결정하기 위해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평민 대표 의원이 포함된 신분별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특권 계층과 평민 계층 사이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일어나고, 삼부회는 지지부진하게 파행을 거듭했다. 제3신분들은 국왕과 귀족 등 특권층에 맞서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7월 11일 정치적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국왕 정부는 2만 병력을 파리에 집결시켰고, 그 무력을 바탕으로 민중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를 파면했다. 그것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의 독단에 따른 것이었다. 네케르의 파면 소식에 분노한 민중과 부르주아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당한 것은 민중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자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루이 14세 때 정치범을 가두었던 감옥으로 전제적인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이었고, 수많은 전설과 소문이 난무하는 공간이었다.

7월 14일 이른 아침, 무기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으나, 필요한 화약을 손에 넣지 못해 무용지물인 지경에 처하게 된 군중들은 다량의 화약이 있다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진격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감옥의 책임자는 군중들에게 발포를 명했으며, 이 과정에서 백여 명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결국 바스티유 감옥이 성난 군중들에 의해 함락되었고 투옥되어 있던 7명의 죄수가 석방되었다. 군중들의 경우 사망자 98명, 부상자가 73명이 나온 반면 수비대 측은 패배 후 학살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망자 1명, 부상자 3명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감옥에는 정치범은 없었고, 수감된 죄수는 모두 7명으로, 그중 4명은 화폐 위조범 등 경제사범, 두 사람은 정신이상자, 나머지 한 사람은 성 범죄자였다고 한다. 다음 날 혁명 정부는 바스티유 감옥의 철거를 결정했으며, 감옥은 1789년 말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선언했고 이어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 입각하여 국민의회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국민의회는 교회재산 몰수, 길드 폐지, 행정과 사법제도 정비 등을 단행했고 1791년 9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791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국민의회 내부에는 귀족의 특권적 지위를 강조하는 파에서부터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급진적 공화정을 주장하는 미라보,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 등의 다양한 정치적 색조가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791년 헌법은 권력분립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규정했다. 1792년 왕정은 폐지되었으며 제1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이라고 불리는 ‘자유, 평등, 우애’라는 슬로건에서도 나타나듯이 프랑스혁명은 경제적 개인주의에 주로 편중되어 있던 종래의 자유 이념을 평등, 우애의 이념과 결합시켜 훨씬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념을 만들어 내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은 ‘인권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선포했을 뿐 아니라 신체, 의견, 양심,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인민주권의 원칙, 모든 공직의 선거, 권력분립에 입각한 대의제와 같은 폭넓은 정치적 권리를 천명하였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은 평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인권선언은 제 1조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속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인간의 자유는 개인적 자유와 함께 평등에 의해서 보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시켰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전제 정치의 타파와 민중의 승리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찬양하는 판화 작품과 노래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났다. 철거된 바스티유 감옥 자리에 지금은 바스티유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52미터의 7월혁명 기념탑이 있고 이 탑 밑에는 1830년 7월혁명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가 묻혀 있으며, 청동 기둥에 그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238 계단을 올라가 정상 부근의 전망대에 서면 에펠탑, 상젤리제 거리 등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1989년 7월 14일에는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파리 라데팡스 지구에 높이 105m 안쪽길이 70m의 신개선문, ‘라 그랑드 아르슈’(La Grande Arche)가 완공되었다. 이 이름은 ‘세계로 향하는 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나치 독일의 1당 독재 체제 구축과 ‘단종법’ 공포

 

(1) 1933년 7월 14일 나치 독일은 정당금지법을 제정,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나치당((Nazi,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독일 내 유일 합법정당으로 선포, 1당 독재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함으로써 민주적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나치 독일은 나치당과 히틀러 치하의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을 가리키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멸망했다. 신성 로마 제국(독일 제1제국, 962~1806)과 독일 제국(독일 제2제국, 1871~1918)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선전용으로 ‘제3제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1932년 나치는 두 차례의 의회 선거에서 최대 득표를 얻었으나 의석 수에서 단독으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1933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곧이어 발생한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으로 히틀러는 긴급 대통령령을 발동하여 비상사태를 선언,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기본권과 노동자의 권리들을 대부분을 정지시켰다. 1933년 3월 5일 총선거에서 43.9%의 득표를 얻은 나치의 히틀러는 의회에서 수권법(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수권법의 요지는 이렇다.

 

(제1조) 입법권을 국회에서 정부(히틀러 내각)로 이양한다.
(제2조) 정부의 입법이 헌법에 우월할 수 있다.
(제3조) 대통령을 대신해 총리(히틀러)가 법령 작성권을 가진다.
(제4조) 외국과의 조약을 성립하기 위한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
(제5조) 이 법률은 한시적 입법이다.  (※ 수권법의 성립에는 중도 정당인 중앙당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제5조의 한시적 입법 규정은 중앙당이 찬성 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었다.)

 

히틀러의 독재 하에서도 바이마르 헌법은 폐지되지 않았지만, 수권법에 따라 사실상 바이마르 헌법은 사문화되었다. 나치당은 이 법률을 적용해 나치당 이외의 정당을 해산하고, 7월14일에는 합법적으로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한다. 대통령의 권한은 불가침이었지만,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후 국민투표에 따라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권한을 겸직한 히틀러는 총통으로서 전권을 장악하였다.
 

(2) 1933년 7월 14일 같은 날 나치 정부는 ‘단종법’을 공포했다. 그것은 ‘유전적 질환을 보유한 자손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라는 이름의 강제 불임법으로, 악질 유전이 예상되는 병에 대해 우생 재판소가 단종 수술을 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했다. 1934년 1월 1일부터 발효된 이 법으로 30~40만 명이 단종 수술을 강요당했다. 불임 수술을 당한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정신박약자로 판정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어 1935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선포된 독일혈통 및 명예보존법(뉘른베르크법)은 독일인과 유대인의 결혼이나 성관계를 금지했고, 한 달 뒤에는 깨끗한 건강 증서를 받은 종족 구성원과 유전질환이나 유전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결혼이 불법화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조직은 내무부 내에서 민족의 건강 업무를 관장하는 제4국이었다.

 

1933년 우생학적 신념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일인 중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민족 공동체의 건강을 위협하는 무익한 존재로 매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 구성원들에게 그런 신념을 불어넣은 인물은 인종우생학의 전문가 렌츠(Fritz Lenz)였다. ‘빌헬름 황제 인류학 연구소’가 인종우생학 연구와 보급의 산실이었다면, 렌츠는 그곳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던 우생학 연구실의 책임자였다.

 

한편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전권을 부여받은 총통비서실에 의해 1939년 여름 그 대상이 장애인 어린이에서 모든 장애인으로 확대된 안락사 프로그램이 완비되었다. 보안 유지에 노심초사하던 총통비서실은 안락사 프로그램에 ‘T-4 작전’이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T-4 작전’이란 이 작전을 주도한 총통비서실 제2국이 베를린 시내의 동물원(Tiergarten) 거리 4번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히틀러가 공식 서명한 명령서에는 “건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장애인들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장애인들의 ‘안락한 죽음’을 위해 하르트하임, 조넨슈타인, 그라페네크, 베른부르크, 하다마어, 브란덴부르크 등 전국에 여섯 개의 살인 센터가 세워졌다. 살인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실험되었으며, 결국 일산화탄소를 가스실에 주입하는 방법이 성공을 거두어 히틀러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다섯 단계의 공정에 따라 희생된 장애인은 나치당의 공식 통계를 따르더라도 1940년과 1941년에만 7만 273명에 이른다.

 

작전은 최대한 비밀 유지에 힘쓰는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독일 내에서 이루어지는 살인이 계속 비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점차 거세어지는 여론의 반발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히틀러는 1941년 8월 24일 이 작전을 즉시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실행팀은 히틀러가 묵인하는 가운데 보안 유지에 더욱 힘쓰면서 작전을 지속했다. 대규모 가스 학살은 사라졌지만 독극물 주입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락사 작전으로 희생된 사람은 20만 명이 넘었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장애인 외에, 여호와의 증인 신자도 있었고, 매춘부와 알콜 중독자도 있었으며, 강제 노역자와 유태인도 있었다고 한다.

장애인 학살은 그 자체로도 전율을 일으키는 비극이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을 가져온 대학살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해 훈련받은 의사들이 그 후 각지의 수용소에 배치되어 살인 대상자 선별과 ‘의학 실험’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후에 동유럽 지역에 절멸 수용소들을 건설하고 운영한,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들도 바로 이들이었다. 나치스의 안락사 프로그램은 앞으로 다가올 본격적인 학살의 전조였으며, 대규모 절멸 작전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전문 인력 양성소였다. T-4 작전의 ‘졸업생’으로서 유태인 학살과 집시 학살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100명이 넘었다.


3)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과 사회민주주의

 

1889년 7월 14일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 즉 제2인터내셔널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에서 결성되었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해산 후 13년만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1889년 대회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1910년 대회에서는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선포했으며,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를 요구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2인터내셔널은 베른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 경향이 강해지면서 내부 통제력과 실효성을 상실, 1916년에 해체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이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적 공산주의운동에 맞서 1947년 국제사회주의자회의위원회를 결성했다. 1951년 프랑크푸르트 대회에서 정식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부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Socialist International)로 발전시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로써 1864년 제1인터내셔널 설립 이후 거의 1세기에 걸친 인터내셔널리즘의 역사적 전통을 비판적 안목에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노동계급의 해방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신조에 의해 실현해보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대회는 사회민주주의 강령과 함께 사회주의자의 국제적 활동과 평화를 위한 투쟁에 관한 결의(‘프랑크푸르트 선언’)를 채택, 사회민주주의의 색깔을 더욱 분명히 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이후 서유럽 사회민주당의 3대 거물인 독일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Sven Olof Joachim Palme),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의 주도 아래 계속 성장하여 서구세계에 존재하는 비공산당 계열의 주요 사민당의 대부분을 포용하게 되었다. 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회 이후 사민주의자들은 점차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자유, 정의, 평등, 연대와 같은 지향가치에 의해 규정하게 되었고 이념적 다원주의를 분명하게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혁명의 방식이 아니라 ‘정치’와 민주주의 방식을 통한 체제와 질서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유럽 사민주의의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골격을 인정한다는 점,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에 의한 자원배분을 인정하고 사실상 존중한다는 점, 다만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의 비중을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려 하며, ‘시장실패’의 범위를 좀 더 넓게 잡아 국가에 의한 경제 개입과 규제의 필요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것.

 

둘째, 조세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을 통한 소득과 소비의 재분배에 치중한다는 점, 주로 누진소득세와 국가 중심의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모든 국민을 사회안전망의 틀 안으로 포용해내려 노력하며 또 상당 부분 성공했다는 것.
셋째, 자유.정의.평등.연대의 정신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약자층의 경제적.사회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노력한다는 점, 특히 사민주의 운동의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계급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주력한다는 것.

 

3. 대한민국 집권당의 민낯 : 1990년 7월 14일과 2014년 7월 14일

 

1) ‘날치기 통과’ 민자당과 민주주의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합당 선언이 있었다. 이를 통해 5월 9일 탄생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은 원내 의석의 대부분인 218석을 차지하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노태우 정부의 정치적 위기는 민주자유당의 ‘날치기 법안 통과’로부터 시작됐다. 1990년 7월 14일 거대 공룡여당 민자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관계법, 국군조직법, 광주보상법 등 26개 쟁점법안을 30초만에 변칙 처리했다. 이에 제1야당 평화민주당(평민당) 국회의원 63명은 의원직 사직서 제출로 맞섰다.

 

그러자 7월 23일 노태우 대통령은 휴가지인 청남대에서 “야당이 요구한 지방자치제법이나 국가보안법 등 쟁점법안을 야당과 재합의하겠다”라는 발표를 한다. 이와 함께 김영삼(민자당 최고위원)과 김대중(평민당 총재)의 만남을 성사시켜 난국을 타개하겠다는 정국 타개책도 내놓았다.

 

민자당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 야당 의원 72명이 심판 청구를 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심리와 선고를 차일피일 미루었고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헌법재판소가 2기를 맞이한 1995년 2월 23일이 되어서야 1990년의 국회 날치기 사건에 대해 전원일치로 각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민자당 후신인 신한국당은 1996년 12월 26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안 등 11개 법안을 또다시 변칙 처리한다.

 

김광웅.김학수.박찬욱 교수가 출간한 <한국의 의회정치-이론과 현상인식>을 보면 1990년 7월 14일 ‘날치기 국회’ 직후(조사대상 2000명) 실시한 ‘국회에 대한 국민의 인식’ 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조사에 따르면, “행정부 대학 국회 언론 법원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기관은 어느 곳입니까”라는 질문에 “국회”라고 응답한 사람은 3.7%에 불과했다. “신뢰할 만한 기관이 없다”는 사람은 31.3%나 됐다. 또 “현 국회의 질적 수준으로 국정의 중심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65.1%가 “없다”라고 답했다. “있다”라는 응답은 8.0% 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르겠다”였다. 그리고 국회에 대한 만족도를 물은 결과 3.8%만이 “만족한다”고 대답했고 불만을 표시한 사람이 77.4%나 됐다. 또 5년 전의 국회에 비해 “좋아졌다”고 보는 사람이 24.5%인 데 비해 “나빠졌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44.6%나 됐다. 6공화국 들어 국회에 대한 기대가 더욱 떨어진 것은 3당합당 이후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5년 후를 상정해 국회에 대한 만족기대치를 조사한 결과, 73.4%가 “지금보다는 좋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정치인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국민의 지지를 회복할 가능성도 없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2) ‘비리 전시장’ 새누리당 제3회 전당대회와 민주주의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김무성, 최고위원으로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 김을동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이정현 의원을 임명하였다. 홍문종 후보는 5위를 차지했으나, 당헌 당규에 따라 6위를 차지한 여성 후보 김을동 의원에게 최고위원 자리를 양보하게 됐다. 김상민 의원, 박창달 전 의원, 김영우 의원은 그 뒤를 이어 각각 7, 8, 9위를 차지했다.

 

“(야권에서)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와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문제점을) 자꾸 이야기한다. 이병기 후보자는 (10년 전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1천만원 벌금을 받았다. 10여 년이 지난 단순한 작은 허물을 가지고 이병기 후보자를 재단하는 것은 너무나 과도한 정치 공세다.” 윤상현(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전당대회가 있기 얼마 전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가 드러낸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에 대한 인식은 충격에 가깝다. 1천만원의 벌금이 순식간에 ‘작은 허물’이 되고 말았다.

 

2012년 초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사건’의 파장으로 위기를 맞았던 한나라당은 “성범죄, 뇌물 수수, 불법 정치자금 수수, 경선 부정행위의 ‘4대 범죄자’는 범죄 시기와 무관하게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공천 기준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당규에도 “부정·비리 등에 관련된 자”를 공직 후보자 부적격 기준의 하나로 명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기준은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제3차 전당대회 출마자들 가운데 유력한 당선 후보들이 모두 비리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무너진 기준’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특히 투톱인 서청원 의원(7선)과 김무성 의원(5선)은 경쟁 과정에서 서로의 전과 기록을 들추며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친박근혜계의 핵심인 서청원은 2002년 대선 때 이른바 ‘차떼기’ 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했다. ‘차떼기’는 새누리당이 불법 정치자금을 현금이 담긴 상자 형태로 트럭째 받은 사건을 뜻하며 새누리당의 대표적인 ‘흑역사’다. 친박연대 대표였던 2008년 총선 당시 서청원은 비례대표 후보자들에게 공천을 주는 대가로 특별당비 명목의 돈 30여억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정도면 정치인들의 비리 전력 가운데서도 상당히 강도가 높다. 이 때문에 당시 당내에서는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서 의원의 공천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2013년 10·30 재·보궐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그에게 지역적 연고도 없는 경기도 화성갑에 공천을 줬다.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무성은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 (주)서울 TRS(서울주파수 공용통신) 이인혁 회장으로부터 수도권 지역사업자로 선정되도록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2천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알선수재)로 벌금 1천만원, 추징금 2천만원을 선고받았다. 또 2000년 16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경쟁 후보에게 현금 500만원이 담긴 봉투를 건넨 혐의(선거법 위반)로 기소돼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다. 김무성 역시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의 범죄자는 범죄 시기와 무관하게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공천 기준에 크게 어긋나는 인물이다.

 

‘새누리당 개혁의 적임자’임을 자처한 홍문종 의원의 경우 1996년 총선 출마 당시 벽시계 등 금품을 돌린 혐의로 기소돼 서울고법에서 벌금 8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문에 2000년 16대 총선에서 총선연대로부터 낙천 대상자로 선정됐다. 17대 총선에서도 선거를 앞두고 유세장에서 했던 말이 허위사실 유포로 고발돼 벌금 250만원(공직선거법 위반)을 선고받고 피선거권이 5년 동안 박탈되기도 했다. 2006년 7월에는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을 지내면서 강원도 수해지역에서 골프를 쳐 제명당했다. 그랬던 그가 2007년 대선 경선 때 박근혜 후보를 도와 친박 계열의 핵심으로 자리잡았고, 황우여 당대표 체제에서 당의 공천 업무와 자금 관리를 담당하는 사무총장 자리를 꿰찼다.

 

이들 외에도 이번 새누리당 전당대회 출마자들 가운데는 ‘문제적 과거’를 가진 이가 많다. 먼저 13번이나 당적을 바꾼 ‘정치철새’의 대명사이자 “지구를 한 바퀴 반 돌다보니 그리됐다”는 명언의 주인공인 이인제 의원이다. 그는 오직 ‘권력’만을 위해 전진한 전형적인 구태정치의 행보를 보여왔다. 김태호 의원도 2010년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거짓말 논란’으로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한 전력이 있다. 당시 김태호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부인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반복해 비판을 받았다. 경남지사 시절 부인이 관용차를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계속 부인하다가 물증이 나오자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결국 자진 사퇴했다. 이런저런 의혹이 계속 불거져 ‘양파 총리’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이들이 어떻게 공천을 받았는지도 의문이지만, 이런 이들이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차기 지도부를 뽑는 선거에 출마해 당당하게 선두를 유지했다는 점은 새누리당에 닥친, 아니 대한민국에 밀어닥친 도덕성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 이후 어언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를 둘러싼 일련의 전개과정은 새누리당의 현주소를 잘 드러내준다. 대통령과 친박계의 모습은 ‘민주헌정질서 파괴’ 그 자체였다. 이들에게서 3권분립의 존중이나 ‘민주적 책임성’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회에 파견된 분견대이자 파수꾼임을 자처하는 볼썽사나운 모습만을 연출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사퇴 발언을 남기고 ‘유승민 파동’은 막을 내렸다.

 

유승민 파동의 애초 발단은 ‘배신의 정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독설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의당 노회찬 전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분은 대통령 스스로가 아닌가 보여지거든요. 지난 6월 25일 ‘배신의 정치는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사태가 시작되었는데, 사실 최근까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다수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물러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배신의 정치를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고 하는데, 국민의 심판에 따르면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뜻을 제기했던 대통령이 사실 겉으로는 승리했지만, 내용으로는 패배한 것 아닌가, 이렇게 보여지고요.”

 

유승민 원내대표가 과연 무엇을 ‘배신’했는가? 민주주의, 민주헌정질서를 배신한 사람은 누구인가?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민주헌정질서를 지키는 것, 양자가 충돌하면서 긴장과 갈등이 빚어진다면 민주사회에서 더 소중한 것은? 전자를 선택한 친박계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만천하에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비박계와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잠깐 시끄러운 듯하다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참으로 놀라운 새누리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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