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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8. 7월 7일 <박정희, 두 개의 ‘뒷’ 이야기>와 <노태우와 이건희의 새로운 실험>

 

 

 



 


                                                                                                                           

조현연 (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7월 7일 ‘오늘’, <박정희, 두 개의 ‘뒷’ 이야기>에서는 ①5.16장학회 설립과 ②경부고속도로 완공의 ‘뒷’ 이야기를, <강자의 선택과 합리화 논리>에서는 ①미국의 하와이 불법적 전복과 ②일본의 자작극, 노구교 사건과 중일전쟁을 다룬다. 이어 <새로운 실험: 노태우의 ‘7.7선언’과 이건희의 ‘7.4제’>에서는 ①노태우 정부의 ‘7.7선언’과 ‘북방정책’ ②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메기론’과 ‘7.4제’에 대해 살펴본다. 끝으로 <죽음과 삶>에서는 코난 도일과 명탐정 셜록 홈즈를 이야기한다.

 


1. 박정희, 두 개의 ‘뒷’ 이야기

 

1) 5.16장학회 설립 ‘뒷’ 이야기

1962년 7월 7일 오늘 ‘5.16장학회’가 설립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부일장학회를 강탈해 탄생시킨 것으로 최초의 장학생은 ‘부산 초원복집 사건’의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세를 떨친 김기춘(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부일장학회 강탈/헌납사건’이란 5.16 군사쿠데타 후 중앙정보부가 당시 부산지역 기업인이던 고 김지태 삼화고무 사장의 부일장학회를 강제로 국가에 헌납하게 한 일을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일장학회의 재산 포기는 헌납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김지태의 큰아들 김영구(전 조선견직 회장)는 “그해(1962년) 5월 25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상태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며 “내가 장남이라 인감도장을 가지고 가,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이 사건에 대해 형식상 “국가권력이 동원된 납치 강도극”이자, 내용적으로는 “언론장악” 사건이라고 증언한다.)

 

1982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5.16장학회는 ‘정수장학회’로 재탄생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과 그의 부인 육영수의 ‘수’를 따와 이름을 고친 것이다. 정수장학회는 주로 박정희의 친인척과 측근이 운영하여 왔다. 박정희 동서인 조태호와 딸인 박근혜가 각각 5대와 8대 이사장을 지냈고,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 박준규(전 부산일보 사장), 진혜숙(전 청와대 총무비서) 등 측근들이 이사를 지냈다. 2005년~2013년까지는 박정희의 공보비서관 출신인 최필립이, 2013년부터 현재까지는 상청회 회장인 김삼천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장학 활동—2012년 현재 장학금으로 지급된 금액은 약 500억원—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도 구성하고 있다. 장학생들은 대학에 다닐 때는 ‘청오회’(靑五會), 졸업 뒤에는 ‘상청회’(常靑會)라는 모임에 가입된다. 상청회는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들의 친목 모임으로 학교로 따지면 동문회인 셈이다. 상청회의 한자 뜻을 보면 ‘항상 청와대를 생각한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여기서 청와대는 박정희를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청회 회원들은 2013년 4월 현재 3만8000명에 이르며 정.관계, 재계, 학계, 언론계 등에 고루 분포돼 있다. 전국 시·도별로 12개 지부가 결성돼 있으며, 매년 정기·비정기 모임을 열어 친목을 다지고 있다. 설립자인 박정희 생가 방문, 체육대회, 가족한마당, 등산 등을 정례적으로 개최하며 연말에는 정기총회와 송년회도 갖는다. 회원들의 결혼·승진·영전 등도 챙기는 등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상청회원 중 상대적으로 젊은 회원은 따로 ‘청여울’(젊은상청)이라는 모임을 운영하기도 한다. 상청회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飮水思源’(음수사원)이라는 박정희의 휘호가 눈에 들어온다. ‘물을 마시며 그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상청회 회원들이 ‘평생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1966년에 설립된 청오회의 ‘청오(靑五)’는 청와대와 5·16을 연상하게 한다. 정수장학회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청오회에 자동 가입되며, 대학 졸업 후 상청회로 적을 옮긴다. 청오회 회원은 2013년 4월 현재 400여 명의 정수장학회 대학·대학원 장학생들로 구성돼 있으며 전국 10개 시·도에 지부를 두고 있다. 각 지부에는 정수장학회 출신이자 상청회 회원인 대학교수 한 명이 배치돼 지도하고 있다. 1967년 3월 박정희는 청오회 회원들의 소식지 ‘청오지’가 창간되자 친필 휘호인 ‘음수사원’을 보내주기도 했다.


2) 경부고속도로 완공 ‘뒷’이야기


(1) 1970년 7월 7일 대전-대구 구간 준공, 개통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은 1967년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처음 공표됐으며, 1967년 12월 13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국가적 차원의 사업으로 진행됐고, 완공된 날 모든 언론이 “한국 역사 50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로 칭송했다.

 

왕복 4차로로 총 416㎞에 달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총 비용 429억7300만원(총 건설비는 384억5600만원), 연 인원 900만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들끓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968년 2월 1일 착공한 경부고속도로는 불과 2년 5개월 만에 완공된다. 수도권과 영남을 잇고, 수출입항인 인천과 부산을 잇는 ‘산업 대동맥’이 생겼으며, 고속도로 개통으로 전국이 ‘1일 생활권’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고속버스도 운행을 시작하였다. 1970년 당시 서울-부산 간 고속버스 요금은 성인 1명 기준 1,600원이었다. 2015년 서울-부산간 고속버스 요금은 23,000원이다.)

 

1970년 7월 7일 대구에서 준공식을 가진 후 5개월 뒤 상행선 추풍령휴게소에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세운다.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이뤄진 이 고속도로를 자랑하기 위해’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의 중간이며 가장 높은 추풍령에 높이 30.8m의 탑을 세운 것이다. 당시 시대적인 아이콘으로 등장했던 네 잎 크로버 형태의 인터체인지 모양을 차용해서 만든, 서울대 미대 송영수 교수의 작품이다. 기념탑에는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과 이한림 당시 건설부장관의 축사 일부가 새겨져 있다.

 

한편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 사고 등으로 사망한 이는 77명에 달했다. 이들을 기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은 금강휴게소 건너편,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서 있다. 위령탑은 기념비보다 먼저 경부고속도로 개통일에 맞춰 건립됐다. 이은상은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 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라는 글귀로 이들을 추모한다.

 

사실 건립 과정에서부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순탄치 않았다. 세계은행(IBRD)으로부터 자금을 구하려고 했지만 IBRD는 남·북 종단도로 건설보다는 동·서 횡단도로 건설이 경제적으로 더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자금 공여를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고속도로 건설에 이용했는데, 일본 경제협력기금을 통해 1968년 300만 달러, 1969년 500만 달러를 사용했다.

 

경부고속도로는 부실 시공으로 인한 시비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12월에 추진위원회가 조직된 지 2개월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전체 설계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가 시작됐고, 공사비 절감을 위해 당초 계획한 24m의 노폭을 22.4m로 줄였다. 좁은 노폭과 건설비 절약을 위해 중앙분리대 등 안전시설 미비는 이후 고속도로에서 중앙 차선을 넘는 정면 충돌사고로 인한 대형 교통사고 원인이 됐다. 시공 기간도 문제가 됐다. 원래 1971년에 완공하기로 한 공사는 1970년으로 1년 단축됐으며, 그나마 1969년 초에는 당시 건설부 장관에 의해 또다시 1년 단축해 1969년 중에 완공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도 전에 부실시공 문제가 나온 것도 이처럼 공기를 단축한 데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개통 1년만에 전 노선에 대한 덧씌우기 공사가 착수됐고, 이로 인한 추가 소요 경비가 건설비의 10%가 되는 42억3000만원에 달했다. 다른 고속도로가 기층과 표층을 합쳐 아스팔트가 섞인 층의 두께가 20㎝ 안팎인 데 반해 경부고속도로는 7.5㎝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도 부실시공의 결과였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경부고속도로가 누워 있으니 망정이지 서 있었다면 벌써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10년이 지났을 때 전체 보수·유지비는 원래 공사비를 넘어선 상태였다.

 

(2) 기념탑에 적혀있듯이 경부고속도로는 분명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상징이자 탄탄한 밑돌이었다. 그럼에도 초대형 공사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사회적 후유증을 낳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와 재벌 사이의 유착관계와 함께, 부동산 투기라는 부작용을 드러냈다. 우마차가 겨우 통행하던 서울~과천~용인~오산 간을 연결하는 구한말 시대의 국도가 경수고속도로 제1차 구간으로 결정되자 주변의 지가전쟁이 점차 양성화되기 시작했다.

 

“이곳의 땅 매매는 거의 전부가 비밀에 붙여져 있으며 밤에만 거래되는 두더지 작전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으로 마련되었다는 S재벌이 기호 주변의 요지 12만평을 지난 3월말까지 완전 매점해 버렸고 그 때 사들인 땅값이 한 평에 단돈 20원, 지금은 이곳 땅값은 7배가 넘는 150원 꼴. S재벌 이외에 3개의 학교재벌이 신갈리 일대와 기호 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변두리지점을 약 5만평이나 매점하고 있다.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지가전쟁은 일단락된 셈이다.” (경향신문 1967년 12월 12일자)

 

사실 경부고속도로의 도로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시작된 강남개발은 ‘토건족’의 시작이자,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평당 5100원에 사들였던 강남땅 18만평을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71년에 1만6천원에 팔아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강남공화국”의 단초가 만들어진 것이며 강남의 역사는 유신독재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강남은 ‘영동’(영등포의 동쪽)이라고 불린,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의 땅이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이곳은 무한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땅이자 가장 강력한 힘과 막대한 돈을 장악한 최상층 기득권자들의 땅이 됐다. 보수가 기존의 사회체제와 지배질서와 그들만의 문화를 지키려는 것을 뜻한다면, ‘강남 보수’는 사실상 한국 최강의 보수 세력이다. 이 ‘강남 보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직접적 산물인 만큼 박정희 시대를 자신들의 이상향으로 여긴다. 박정희가 ‘강남공화국’과 격차사회의 신화를 창조했다면, 그 신화야말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뿌리였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는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9>영동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966년, 말죽거리 즉 지금의 양재동에서는 꽤 괜찮은 땅 한 평의 값이 300원에 불과했다. 그때의 짜장면 값은 30원. 지금까지 짜장면 값이 한 150배 정도 오르는 동안, 말죽거리 땅값은 평당 3000만원 이상으로 10만배가 넘게 올랐다. 자고 일어나면 수십배씩 땅값이 오르던 시절, 말죽거리에 땅을 사놓은 사람들에게 한국현대사는 그야말로 ‘말죽거리 신화’였다. 그러나 거기 땅 한 뼘 갖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섭게 땅값이 치솟아 오르는 한국현대사는 ‘말죽거리 잔혹사’였다.”

 

“십여년 전 마봉춘이 제정신이던 시절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편을 연출한 유현 피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만들고 보니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웃기는 짜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불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유신은 이렇게 오늘을 지배하고 있다.”

 

 

2. 강자의 선택과 합리화 논리

 

1) 미국의 하와이 불법적 전복

1898년 7월 7일 미국이 하와이를 불법적으로 전복시키고 병합했다. 하와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과 거의 유사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①먼저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난다. ②그 다음 단계로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공화국을 세우고, ③이 공화국이 미국에 자신들을 합병해달라고 요청하면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주는 식이다.

 

하와이는 본래 독립국가로서 1795년 카메하메하 1세가 하와이 왕국을 잠정 통일, 1810년 완전 통일 이후 왕조 체계가 유지되던 독립국가(하와이 왕국)였다. 19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하여 제당업이 번창하자 중국, 일본인 등 아시아인을 포함한 다른 외국 이민이 증가하고 이때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그러다가 1890년의 미국 관세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 농장주들의 면세혜택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을 시도한다. 1893년에 미국 사업가들의 주도로 하와이 쿠데타를 일으켜 여왕을 권좌에서 쫓아내고 형식적으로 공화국을 세운다. 이후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합병운동은 “Newlands Resolution”라 하여 미국에 하와이를 합병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1897년 6월 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을 체결, 1898년 7월 7일 이 조약을 미국 의회가 비준한다. 결국 1898년 8월 12일 하와이는 멸망하였다. 미국의 불법적 전복 직후에는 하와이는 준주(準州)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주(州) 승격운동이 활발해져 1959년 8월 21일 알래스카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과거에 식민 지배를 했던 측이 피지배 시민에게 사죄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전혀 없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의 ‘하와이 병합 사죄 결의’가 그런 사례이다. 하와이왕국이 불법으로 미국에 병합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인 1993년 의회는 ‘1893년 1월 17일 하와이왕국 병합 백 주년 기념일을 승인하는 한편 병합에 관해 미국을 대신하여 하와이 원주민에게 사죄하는 결의’를 가결했다. 이 결의는 상하 양원을 통과한 후 그해 11월 23일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하여 법률로 공포되었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 이별의 날은 왔도다 /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 서로 작별하여 떠나네 //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 꽃피는 시절에 만나리 /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 다시 만날 때까지” 알로하 오에(Aloha Oe)란 ‘그리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곡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석별의 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노래다. 하와이안 송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공주시절 만든 노래라고 한다.


2) 일본의 자작극, 노구교(루거우차오) 사건과 중일전쟁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이 발생한다. ‘7.7사변’이라고도 하는 이 사건은 베이징 서남쪽 방향 노구교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어진 발포 사건으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노구교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부르는데, 전략적으로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으로 사건 발발 당시 일본군은 서쪽을, 국민당군은 동쪽을 관할하면서 대치하고 있었다.

 

무력충돌을 회피하는 장개석의 군대를 전쟁 속으로 끌어들일 기획물이 필요했던 일제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기회는 왔다.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군사훈련과 야간훈련을 실시하면서 중국군을 자극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던 일본군은 만주사변에서 갈고 닦은 자해공갈의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 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 주둔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중국군은 거절하였다. 일본군은 곧 전투태세에 들어가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노구교를 점령했다. 양측이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상에 들어갔다.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침략을 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곧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관동군과 조선 주둔군이 중국 본토로 증강되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2개 사단이 추가로 증파되어 만리장성 밖에서 대기 중이던 병력들과 합세했다. 중국내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지는 가운데, 국민당은 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대 일본 항전에 들어갔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라 하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 지속된 전쟁을 말하며,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해를 기준으로 시작점을 보고 있다. 일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태평양 전쟁은 이보다 2년 늦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를 대상으로 하며, 그 시작점은 미 군사기지 진주만이 기습공격을 받은 1941년 12월 7일이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에 시작되었고 태평양 전쟁은 1941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 속에는 ‘전쟁 피해자로서의 아시아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펴본 것처럼 중국과 일본 간에 전면전이 발발한 시점은 1937년이며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한 시점 역시 1940년이다. 1941년 진주만 폭격이 펼쳐지기 훨씬 전부터 일본의 침략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1941년 이후 시기만을 태평양 전쟁으로 정의내린 이유는 뭘까? 그건 이 용어가 서구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 태평양 전쟁은 미국과 일본이 벌인 전쟁을 지칭하며, 따라서 그 시기도 미국이 공격을 받은 시점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일제가 일으킨 모든 전쟁을 제대로 규정하자면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명칭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3. 새로운 실험: 노태우의 ‘7.7선언’과 이건희의 ‘7.4제’

 

1) 노태우 정부의 ‘7.7선언’과 북방정책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이라는 이름의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한다.
1988년 봄부터 재야단체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통일논의가 확산되면서 6.10남북청년학생회담의 강행으로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처럼 통일운동의 기운이 가열화되는 가운데 노태우는 북한.중국.소련에 대한 개방정책을 표명하는 6개항의 대북정책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노태우는 자주.평화.민주.복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족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사회.문화.경제.정치공동체를 이룩함으로써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갈 것을 천명하고, 다음과 같은 6개항의 실천방안을 제시하였다.

 

①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자유로운 남북왕래를 위한 문호 개방, ② 이산가족의 서신왕래 및 상호방문 적극 지원, ③ 남북간 교역을 위한 문호 개방, ④ 비군사물자에 대한 한국의 우방과 북한간의 교역 찬성, ⑤ 남북간의 소모적인 경쟁대결외교 지양 및 남북대표간의 상호협력, ⑥ 북한과 한국 우방과의 관계 개선 및 사회주의 국가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상호협조.

 

7.7선언은 노태우 정부의 통일외교정책의 기본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한편으로는 북한을 적대적인 경쟁상대로 인식하지 않고 적극적인 대북협력 의지를 표명하면서 각종 대북 제의에서 항상 수반되었던 전제조건을 달지 않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논의와 대북 접촉창구를 정부가 독점함으로써 재야 및 학생들의 통일 논의를 억압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 선언은 이후 남북국회회담 및 남북고위급회담을 위한 예비회담 등 남북대화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사회주의권과의 경제교류 및 수교 등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북방정책(Policy toward North)이란 중국.소련.동유럽국가.기타 사회주의 국가 및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노태우 정부의 외교정책이다. 그것은 중국.소련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주의 국가와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이익의 증진과 남북한 교류·협력관계의 발전을 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와의 외교 정상화와 남북한 통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북방정책’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983년 6월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이 국방대학원에서 행한 연설에서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북방정책이란 표현은 기존의 대공산권 정책과 거의 같으나, 공산권이란 용어는 국제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적절한 측면도 있고 불필요한 자극적 요소가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하여, 공산권 외교에 대해 보다 온건하고 세심한 배려를 담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공산권외교의 적극적 방향 전환을 시사한 것이지만, 그동안 지나치게 친서방 정책에 편중해 온 외교정책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북방외교는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본격적으로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하면서 적극화 되었다. 이 취임사를 계기로 이른바 7·7선언이 발표되었으며, 북방대륙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이 적극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북방외교, 북방정책은 그 현실화를 위한 첫 단계로 동유럽 국가와의 교류를 시작하여, 1992년 8월 24일에는 한.중 수교를 통해 1949년 이후 무려 43년 동안 교류가 단절됐던 중국 대륙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사실상 막바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함께 노태우 정부가 애초에 표방했던 북방정책의 궁극적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북 평화.통일외교는 일련의 방북사태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991년 9월 18일 유엔 동시가입, 1992년 2월 19일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 등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2)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메기론’과 ‘7.4제’

1993년 7월 7일 삼성그룹은 근무시간을 출근 오전 7시, 퇴근 오후 4시로 바꾸는 이른바 ‘7.4제’를 실시한다. “1993년 7월 7일 오후 4시. 서울 중구 태평로에 위치한 삼성그룹 본사에서는 직원들을 쫓아내느라 소란스러웠다. 한참 일할 때인 오후 4시에 쫓겨난 직원들은 건물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일부는 밖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들어오기도 했다.” 삼성 신경영의 대표적 제도인 7·4제 실시 첫날의 모습이었다.

 

“아침 7시 내지 7시30분에 시작해서 오후 4~5시 사이에 일과를 끝내 보세요. 그래서 귀가하기 전에 어느 곳을 들러서 운동을 하든지, 친구를 만나든지, 어학 등 공부를 하든지 하고 6시 30분 전에 집에 들어가라는 겁니다.” 신경영 선언을 구체화하는 신호탄이었던 7.4제는 이건희 회장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이렇게 시작됐다. 질(質) 위주의 경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직원들 삶의 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7·4제의 진정한 의미는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든 직원이, 매일매일 획기적인 방법으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7·4제 자체가 일종의 조직 내 ‘메기’와 같은 것으로, 이를 통해 직원들이 변화에 대한 회사의 의지를 체감하도록 한 것이다. “미꾸라지를 키우는 논 두 곳 중 한쪽에는 포식자인 메기를 넣고 다른 한쪽은 미꾸라지만 놔두면 어느 쪽 미꾸라지가 잘 자랄까. 메기를 넣은 논의 미꾸라지들이 더 통통하게 살찐다. 이들은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운동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시작하면서 설파한 이른바 ‘메기론’이다.

 

이건희가 ‘메기론’을 역설하며 조직에 긴장을 요구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삼성은 1991년 이후 재계 2위로 뛰어오르며 나름 순항을 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생각이 그것으로, 발단은 1993년 삼성전자 제품의 디자인 문제를 제기한 후쿠다 보고서였다. 수없이 삼성 디자인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내부에선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급기야 후쿠다 고문은 사표와 함께 한 장의 보고서를 이건희에게 제출했다. 뒤이어 전달된 삼성 사내 방송의 몰래카메라는 이건희가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라”고 말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계기가 될 만큼 충격적이었다. ‘품질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몰래카메라 내용 중 세탁기를 조립하는 한 직원이 여닫는 문이 맞지 않자 면도칼로 깎아내는 장면이 나온 것.

 

이때부터 이건희는 ‘삼성에 필요한 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변화’라는 결심을 굳히면서,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7·4제’를 도입했다. 그리고는 ‘메기론’을 필두로 ‘파이프론’ ‘실패의 자산화’ ‘거북이론’ ‘천재경영론’ 등 수많은 경영론을 직원들에게 역설했다. 이건희 회장의 몇 가지 경영론을 살펴보면 이렇다.

 

* 개구리론 = 개구리 눈이 머리에 달린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다. 뒤까지 볼 수 있도록 창조 또는 진화된 것이다. 동물과 달리 사람은 위기에 민감하지 못하다.
* 기러기론 = 기러기는 편대비행을 한다. 향도가 맨 앞에 날고 나머지는 향도기러기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밤에도 향도만 잘 날면 기러기는 길을 잃지 않는다.
* 거북이론 = 모래 속 깊은 구덩이에서 깬 바다거북은 모래웅덩이를 빠져나올 때 꼭대기에 있는 거북은 천장을 파내고, 가운데에 있는 것들은 벽을 허물고, 밑에 있는 거북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밟아 다지면서 함께 모래 밖으로 기어 나온다.
* 파이프론 = 지금 1백cm 파이프도 한 곳이 50cm면 50cm 파이프 구실밖에 못한다. 기업도 생산·유통·판매·경영관리 중 하나라도 이류면 이류 기업밖에 안 된다. 

 

신경영과 창조경영의 ‘신화’를 창조한 이건희. 그런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 그토록 강조한 끊임없는 ‘창조’와 ‘혁신’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1인 회장 정점의 제왕적 지배구조(황제경영)이며, 전근대적이고 탈법적인 무노조 경영에서는 진정한 변화와 혁신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2년 전인 2013년 신경영 20주년을 평가하며 나온 다음의 지적은 앞으로 삼성의 변화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삼성 조직은 이건희 회장이라는 제왕을 정점으로 수직적 위계질서를 갖고 있다. 윗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살아남는 조직 풍토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발상이 꽃피겠느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선친 이병철 회장의 뜻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은 반 헌법적 사상이고,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되면 부당노동행위의 범죄행위가 될 뿐이다.”

 

 

4. 죽음과 삶 : 코난 도일과 명탐정 셜록 홈즈

“사람이 만든 문제라면 사람이 풀 수 있다.”(What one man can invent, another can discover.) “실패는 누구나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패를 깨닫고 바로 잡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다.” “정보를 얻기 전에 가설을 세우는 건 치명적인 실수이다. 사실에 이론을 맞추는 대신에 자기도 모르게 이론에 맞춰 사실을 왜곡하게 되니까.” 1930년 7월 7일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이자 의사인 아서 코난 도일(Sir Arthur Ignatius Conan Doyle)이 세상을 떠났다. 코난 도일은 에드거 앨런 포와 에밀 가보리오를 동경하다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자 명탐정의 대명사인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를 탄생시켰다.


<주간경향> 1046호(2013.10.15.)의 ‘대문호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코난 도일을 읽는 밤>’은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도 코난 도일의 생가와 무덤은 많은 이들이 찾지 않거나 그 존재조차 모르는 반면, 셜록 홈즈의 사무실이 있다고 소설에서 설정된 가상의 주소인 ‘베이커가 221B번지’에는 수많은 이들이 성지 순례를 하고 있다. 코난 도일은 소설가이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때문에 오히려 빛을 못 받고 있는, 그런 행운과 불운을 동시에 가진 작가인 셈이다.”

 

의대를 졸업한 직후 코난 도일은 영국 포츠머스에서 개업의사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학 애호가들에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환자들이 좀처럼 그를 찾지 않았다. 덕분에 대체로 한가했고, 낮에도 병원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집필한 몇몇 단편들이 성공을 거두자, 1886년에 드디어 운명적인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장르는 추리소설로 정했고, 관건은 주인공이었다. 그에겐 어려운 사건을 척척 해결하는 매력적인 주인공이 필요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바로 대학 시절의 옛 은사인 조셉 벨 박사였다.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 괴팍한 성격, 독특한 습관 등 모든 특징이 완벽했다.

 

코난 도일이라는 30대 초반의 젊은 의사는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열정적으로 셜록 홈즈 이야기를 썼다. 이렇게 완성되어 1887년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작품이 바로 중편소설 <주홍색 연구>다. 코난 도일은 그 후로도 셜록 홈즈와 그의 동료 왓슨 박사가 주인공인 작품들을 써서 1891년 초부터 <스트랜드 매거진 Strand Magazine>에 연재했다. 홈스가 등장한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은 대중의 호응을 얻어 추리소설이 널리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도일은 <주홍색 연구>를 세상에 내놓은 이후, 홈스에 대한 폭발적인 인기에 염증을 느껴 1893년 <최후의 사건>이란 작품에서 홈스로 하여금 극적인 죽음을 맞게 한다.

 

이 단편은 발표와 동시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홈즈 추종자들은 슬픔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실재하지도 않는 탐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팔뚝에 검은색 띠를 두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는 건 독자들의 몫일 뿐, 정작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최후의 사건>을 탈고한 날, 그는 일기에 간단히 ‘홈즈를 죽였다.’고만 기록했다.

 

그렇게 코난 도일은 홈즈에게서 벗어난 것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지한 비소설부터 역사와 모험을 버무린 소설까지, 그는 그동안 미룰 수밖에 없었던 소재들을 마음껏 활용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들을 썼다. 하지만 홈즈는 역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숙적, 즉 자신을 창조한 작가조차 능가할 정도로. 코난 도일은 결국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굴복해 홈즈를 다시 살려내고 말았다. 그는 다시 펜을 들고 1901년부터 1927년까지 셜록 홈즈의 새로운 활약상을 꾸준히 발표했다. 이 명석하고 비범한 탐정은 <최후의 사건>에서의 죽음마저 가볍게 무시한 채 전매특허인 파이프담배를 입에 물고 허연 연기를 뿜어내면서 화려하게 생환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서평가이자 퓰리처 상을 받은 평론가인 마이클 더다(Michael Dirda)는 평생 동안 셜록 홈즈와 코난 도일의 오랜 팬이었다. 그는 전 세계 셜로키언들의 모임 중 가장 유명하고 로맨틱한 집단인 ‘베이커 가 특공대(The Baker Street Irregulars)’ 회원이자 <코난 도일을 읽는 밤-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의 저자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그는 모든 종류의 스토리텔링을 아우르는 코난 도일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밝히며 “좋은 이야기는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가르침을 준다. 그리고 셜록 홈즈 시리즈가 단순한 살인 미스터리가 아니라 도덕에 관한 소설이라고 정리한다. “홈즈는 위선 앞에 결코 머리 숙이지 않았고 옳다고 믿는 바를 언제나 행하며, 고통받고 절망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믿음직스럽게 행동하는 기사도적 이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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