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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11. 5월 20일 ‘더불어 살아가기’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5월 20일 ‘오늘’의 주제는 <더불어 살아가기>로, ①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유대인 학살 ②‘인류가 만든 가장 평등한 물건’ 청바지 ③‘세계인의 날’ 등 세 가지 소재를 갖고서 이야기한다. 맺음말에서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대한민국 만들기’의 열쇳말인 ‘호남’과 ‘노동’에 대해 살펴본다.


1.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유대인 학살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Forgive but not forget).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떨어진 폴란드의 오시비엥침(Oswiecim)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담벼락에 있는 적혀 있는 문구다. 아우슈비츠는 인류 최초로 산업적인 수단을 이용한 인종 학살이 이루어졌던 곳이자.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 주는 곳이다.

 

1940년 5월 20일 나치가 세운 6개의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로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완공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 중 하나로 기록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처음으로 문을 연 것이다.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가 세워졌으며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 살해시설로 확대되었다. 

 

아우슈비츠는 1945년 1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 1945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강제수용소 건물을 파괴하고 막사를 불태웠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으며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우슈비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인간의 가치와 이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로부터 선포되었던 유네스코 규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 14일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 로마인, 옛 소련군 포로,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 정신질환자, 동성애자 등이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것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 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수용소에서 주된 살해 도구로 사용된 것은 치클론-B라는 독가스였으나, 과도한 노동, 굶주림, 구타, 이유 없이 행해지던 사격으로 인해 죽은 이들도 많았다. ‘악의 화신’,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라는 별명을 얻은, 집에서는 한없이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내과 의사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가 실시한 생체 실험은 특히 끔찍스러웠다.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30개 나라에서 강제로 끌려온) 약 400만 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자 기사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1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대인 희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쓰고 있다.

 

2. ‘인류가 만든 가장 평등한 물건’ 청바지, 특허를 받다

 

“청바지에는 6가지 요소가 없다고 합니다. 나이·성별·계급·국가·계절·차별입니다. 인류가 만든 가장 평등한 물건이라 불리는 이유죠.” 세계 인구와 맞먹는 연인원 70억 명이 입었다는 청바지는 자유·평등사상, 계급사회 철폐,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또 신분 과시용 명품이 아닌 대중의 영원한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열렬한 청바지 애호가인 패션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청바지를 ‘진정한 패션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빈부나 남녀노소의 차별이나 차 이 없이 사계절에 모두 입을 수 있는, 또 장소나 행사도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옷이기 때문이다.

 

잘 해지지 않고 더러움도 안타 광부들의 작업복에서 유래된 청바지. 140여 년이 흐른 지금 청바지는 말이 필요 없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패션 아이템이다. 1873년 오늘, 미국인(독일 태생 유대인)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가 자신이 발명한 청바지의 특허를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금광에서 금을 캐던 광부들의 바지가 쉽게 헤진다는 데 착안한 리바이는 질긴 천막용 천으로 바지를 만들었고 광부와 카우보이들이 즐겨 입으면서 히트를 쳤다. 청바지 제조업체 리바이스(Levi's)는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설립한 회사다. 19세기 말 본격적인 산업화에 진입한 미국은 스트라우스의 청바지를 위한 좋은 시장을 제공했다. 진 바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바지가 조금 무겁다는 소비자의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스트라우스는 가벼운 면 소재인 데님으로 옷감을 바꿨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전선에 참전한 미군들이 진 바지를 즐겨 입었다. 청바지가 미국을 넘어 세계화 상품으로 발전한 계기다.

 

청바지는 1950~60년대에 대도약기를 맞는다. 세계적인 록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대표적인 청바지 전도사였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영화배우 제임스 딘과 명배우 말론 브란도 그리고 비운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도 청바지의 충실한 홍보대사였다. 멋과 실용성을 모두 지닌 청바지는 작업복.평상복.레저용 등으로 용도가 다양화되어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옷이 되었다.

 

한편 청바지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한국전쟁 즈음이라고 한다. 참전한 미군들이 작업복으로 입었던 청바지가 전쟁 후 시장에서 팔리며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64년 개봉한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주인공 신성일이 ‘진’이라 불린 청바지를 입고 등장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청바지 남성 모델인 이재연 모델라인 회장은  “당시 청바지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회상한다. “제가 고등학생 때 몰래 영화관에 가서 본 영화가 맨발의 청춘이었어요. 영화 속 신성일씨가 입은 바지가 너무 멋져서 여기저기 알아보니 청바지라는 거예요. 남대문 시장에 두세 번 갔는데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귀했죠.”

196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 만든 청바지를 구입하거나, 검게 물들인 미군 작업복을 간신히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후 국내에 공장이 들어서며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비로소 청바지 문화가 확산됐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청바지는 폭발적으로 보급됐고 청춘과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1960~70년대의 젊은이들은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든 채 부정의하고 억압적인 현실에 맞서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꿈꿨다.

 

1980년대에 이르러 청바지는 젊은이들의 옷이라는 편견을 깨고 컬러TV의 등장에 힘입어 ‘국민 바지’로 거듭났다. TV에는 청바지를 입고 여유를 즐기라는 광고가 인기를 끌었다. 이제 더 이상 청바지는 자유와 저항을 상징하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3. 5월 20일은 ‘세계인의 날’

 

‘차이를 넘어 더 가까이, Beyond Difference, Closer to You.’ 2015년 제8회 세계인의 날 슬로건이다. 5월 20일 오늘은 세계인의 날로 국가가 지정한 기념일이다. 그런데 다른 기념일과는 달리 세계인의 날이 어떤 날인지, 그 유래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세계인의 날(Together Day)이란 다양한 민족,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날이다.

 

2007년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재외법)에 의해,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조성하기 위하여 매년 5월 20일을 세계인의 날로, 세계인의 날부터 1주간을 ‘세계인 주간’으로 제정하였다. ‘외국인의 날’ 대신 ‘세계인의 날’로 정해진 것은 차별 요소를 고려한 것으로, 2006년 3월 개최한 이민정책포럼을 통해 명칭과 날짜를 논의한 결과였다. 또한 본래 UN에서 정한 ‘세계 문화 다양성의 날’을 기념하는 5월 21일로 계획하였으나, ‘부부의 날’과 겹쳐 하루 전날인  5월 20일을 최종적으로 선정하였다.

 

재외법에 따라 행정안전부(행정자치부)는 각 지방자치단체에 거주외국인 지원조례를 만들 것을 하달해 전국의 거의 모든 곳에서 행자부가 만든 표준 조례안대로 지방조례를 만들었다. 세계인 주간에는 전국 각지에서 시민과 재한외국인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형 문화행사와 토론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재한외국인에게 전국 국립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을 무료로 개방한다.

그런데 “기념식은 법무부에서 주관하며 국민과 외국인 간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정부의 다문화 포용 의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로 삼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의 실상은 이렇다. “토론회만 열심히 하면서,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진행하던 소규모 다문화축제를 대규모 예산을 들인 이벤트로 바꿔내는 일에 집중한다. 이 모두는 고스란히 UN인권보고서에 이주민 인권의 성과로 기록되어 보고된다. 세계인의 날을 관이 주도하면서 왜곡되고 있는 한국의 다문화 현상의 민낯이다.”

 

세계인의 날에도 서러운 사람들이 있다. 미등록 이주민들이 그들이다. 재외법에서는 “재한외국인이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자로서 대한민국에 거주할 목적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자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사람들에게 인권이, 생존권이, 행복권이, 교육권, 주거권, 문화가 존재할리 만무하다. 철저단속과 강제추방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2008년 3월에 제정된 다문화가족지원법도 마찬가지로, 법에서 말하는 ‘다문화가족’이란 대한민국 국민과 혼인한 적이 있거나 혼인관계에 있는 재한 외국인 그리고 국적법에 의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자로 이루어진 가족을 말한다. 결국 부부 중 한명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어야만 법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다문화가족이 된다.

 

“장애인의 날에 갇힌 장애인 인권처럼 이주민,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하루에 가두고 관리 홍보하려는 세계인의 날이 될까 두렵기도 하다.”는 이상재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활동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몽골부부는 단문화가족이고, 방글라데시 남성과 인도네시아 여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다다문화가족인가?”

 

4. 맺음말 : ‘호남’과 ‘노동’

 

1) 30년 전 오늘인 1985년 5월 20일 5.18광주민주항쟁 체계적으로 기록한 첫 공식출판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가 출간되었다. 신군부의 학살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잔혹하게 파괴했는지 그 실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10일간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공식 출판물인 <넘어 넘어>는 이재의·조양훈이 기본 집필을 하고, 소준섭·김상집·최평지·전용호·정상용·정용화·조봉훈 등의 땀이 배어 있는 집단 기록물이었다. 당시의 암울한 시기에 공안기관의 탄압을 피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황석영 작가의 이름을 빌려서 출간한 것이다. 정상용 전 국회의원은 “황 작가가 자료 수집과 집필 등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보호하려 방패막이 역할을 한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고 말한다. 책 집필자를 두고 억측이 일기도 했던 것은 “가해자 전두환이 집권하던 때라 집필 경위를 소상하게 밝힐 수가 없었던 시대상황 때문에 빚어진 일”이기도 했다.

 

“광주의 이름없는 청년들이 썼다고 하면, 유인물 수준이라고 하지 누가 믿겠나?” 지금껏 <넘어 넘어> 집필자로 알려졌던 황석영은 2014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세 팀 정도가 기록한 것을 (내가) 모아서 간추린 것이다. 그 책이 창작이 아니고 기록이지 않나? 기자들이 기사를 보내면 데스크가 손질하는 것처럼 (책) 데스크 노릇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황석영은 85년 4월 서울 풀빛출판사 인근 여관에서 한달 남짓 두문불출하며 원고를 가다듬었다. 읽기 쉽도록 소제목들을 달았고, 문병란 시인의 시 ‘부활의 노래’에서 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란 책 제목을 붙였다. 책이 나오자마자 2만여권이 압수당하고 풀빛 출판사 나병식 대표는 구속됐다. 표지 디자인 없는 백지로 다시 찍은 초판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언제부턴가 제1 야당에서는 ‘친노 대 호남’이라는 기묘한 갈등구도를 만들어내어 어이없는 정치 촌극을 주구장창 틀어대느라고 여념이 없다. 또 5·18 정신을 훼손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행위가 도를 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도 있다. <넘어 넘어>가 염원했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꿈이 이제 호남에서는 사라진 것일까?


2) 1998년 5월 20일 오늘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국민승리21을 확대·개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적극 지원, 연대한다”고 결정했다. 많은 난관 속에서 나온 이 결정이야말로 민주노동당 창당의 견인차로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탁월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14년의 시간이 흐른 2012년 8월 13일 밤에는 14년 전과 정확히 반대되는 내용의 노동정치, 진보정치의 결정이 내려졌다. 오후 2시부터 밤늦게까지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연 뒤, “현재의 통합진보당은 노동 중심성 확보와 1차 중앙위원회 결의 혁신안이 조합원과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는 수준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지지를 철회한다”고 결정했다. 격론 끝에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킨 표결권자 39명 중 27명이 지지 철회안에 찬성한 것이다.

 

예상된 결과였다.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이미 지난 2012년 5월 17일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비례대표 사퇴를 전제로 ‘조건부 지지 철회’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중앙위의 폭력 사태를 볼 때 지지 철회가 옳지만, 강기갑 대표와 통합진보당이 혁신하는지 지켜본 뒤 최종 결정하겠다는 취지였다.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안이 7월 26일 통합진보당 의원총회에서 부결됐다. 민주노총의 지지 철회 결정은 이런 사태 뒤에 이뤄졌다. 노동정치가 ‘더불어 사는 세상’의 길로 다시 힘차게 달려 나가려면, 꺼져가는 진보정치의 불씨를 잿더미에서 찾아야 하는 길목에 서게 된 것이다.


3) ‘호남’과 ‘노동’. 이러저런 이유로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지난 수십년간 민주주의의 버팀목으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길목에서 진보정당이 수권정당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아직까지는/여전히 회피하거나 우회할 수 없는 열쇳말이자 핵심 문제영역이기도 하다. 과연 누가 이들을 정치의 세계로 새롭게 다시 초대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기회는 정의당에게도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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