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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5. 4월 9일 고문과 ‘우상’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4월 9일 오늘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을 기억나게 하는 날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늘의 주제는 고문과 ‘우상’이다. 먼저 고문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고문, 인간 파괴의 적나라한 현장

 

고문이란 어떤 걸 말하는 걸까? 1975년 12월 9일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고문 및 기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나 형벌 방지에 관한 선언 제1조’에 따르면, ‘가혹행위’를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형벌이나 처우를 통칭하는 광의적이며 일반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면, ‘고문’은 조직적인 명령 체계 속에서 정형화된 방법과 도구로 관례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좀 더 협의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고문은 단순히 고문 기술자 개개인의 성격이 가학적이라거나 법적인 규제가 허술하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보를 캐내거나 허위 자백을 통해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사용된다. 국제앰네스티의 정의처럼, ‘당사자 또는 제3자로부터 정보나 자백을 얻거나 협박할 목적으로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심대한 고통이나 괴로움을 가한 행위’가 바로 고문인 것이다.

고문은 희생자의 신체뿐만 아니라 인간성마저 파괴하며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과 공포의 수단이 된다. 또한 고문은 그것에 가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비인간화시킨다. 고문 수사의 경우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도구가 동원되고, 이를 통해 육체에 대한 고문과 정신적?심리적 고문이 자행되며, 외부와 차단된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저질러진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고문의 역사와 전통을 유감없이 빛내온 국가다. 특히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통치 이후에도―해방 후 헌법과 형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이 불법적인 범죄행위라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고문은 불의한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주요 수단으로 상시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주요하게는 민주인사, 반정부 집단에게 가해진 고문은 체제와 정권에 도전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경고이자 협박이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의 공안조작사건과 전향공작에서의 백색테러와 ‘고문잔치’, 80년대 중후반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이근안에 의한 김근태 고문사건 등은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대표적인 고문이었다. 1986년 경찰의 날에 대통령 전두환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은, 고문기술의 달인 이근안은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스러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 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고 하면서, 김근태에게 동물적인 능욕에 가까운 고문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때 그 시절 ‘남산’(중앙정보부의 별칭)의 지하실과 보안사 서빙고분실(일명 ‘빙고호텔’)과 치안본부의 대공분실 등은 말만 들어도 몸이 움츠러드는, 악명 높은 고문과 공포의 공간이었다. 지상에 지옥의 풍속도를 연출해내면서 사람을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대한 고문에 대해, 시인 김남주는 1979년 남민전 사건 당시 60여일 동안의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아 해방이다. 살 것 같다. 이제 죽어도 좋다!/허위와 위선으로부터/고문으로 공포로부터/60일간의 긴장으로부터 해방이다!”

 

한 증언자는 “중앙정보부의 취조관들이 뱀 같은 냉혈동물이라면, 대공분실의 취조관들은 한 마리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늑대떼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이 짓밟혀진 숱한 사례들, 그 배경에는 “빨갱이를 막으려면 국민들의 인권쯤은 희생되어도 된다”는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반공주의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인간임을 스스로 포기한 고문 기술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런 고문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는 헌법 파괴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프랑스의 문호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고문의 목적이 오직 자백과 밀고의 강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생자는 자기 자신을 모멸해야 한다. 자신의 비명소리와 자신의 굴종에 의해, 동물처럼 그 자신과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고문에 굴복하는 그는 단지 입이 열려지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강요하고 강요된 자백을 근거로 이른바 ‘정찰제 판결’이 특히 유신독재 시절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정찰제 판결이란 말은 유신독재 시절 검사의 구형 형량과 판사의 선고 형량이 정확히 일치하는 맞춤형 판결을 뜻하는 것으로,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의 재판 결과를 놓고 한승헌 변호사가 처음으로 쓴 말이었다. “후세의 역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 아닌 군법회의에서 먼저 확립되었다’라고.”


1) 1975년 4월 9일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5년 4월 9일. 이날은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연루자 8명―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대법원의 사형선고가 있은지 18시간만의 일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그로부터 20년의 시간이 지난 1995년 4월 25일 MBC의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판사들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시간을 되돌아가보자. 유신독재 시절이었던 당시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런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그리고는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한 뒤 국가전복 행위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는 거짓이 만들어졌다.

 

 

 

 

< 긴급조치 제4호’ 핵심 내용 > 

- 이 조치에 위반한 자,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되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유기징역에 처하는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 학생의 출석거부,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시위?성토?농성, 그 이외의 모든 개별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학생은 퇴학, 정학처분을 받고 해당 학교는 폐교처분을 받는다.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024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되었다. 관련 구속자들에게는 온갖 고문들이 자행됐다. 심지어 부인들까지 중앙정보부로 데려와 감금하고 협박해 “내 남편은 간첩”이라는 자술서를 쓰게 했다. 이때의 자책감 때문에 김용원의 부인 유승옥은 일가족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유신독재 체제 아래서 군사재판이 공정할 리 만무했다. 재판을 하다 말고 변호사가 정부와 판사를 비판했다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나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사건을 취재하던 일본 언론인을 긴급조치 위반과 내란선동죄 등으로 구속할 정도로 극심한 보도통제가 이뤄졌다. 그러나 조직 사건의 실체는 없었고, 오직 고문과 협박으로 만든 허위 자백만 있을 뿐이었다. 한 예로 피고인들의 배후로 중앙정보부가 지목한 ‘월북자’ 김상한은 대한민국 정부가 포섭한 ‘북파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발간한 <1970년대 민주화운동 1>(1986)을 보면, 구속자들 가운데 169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사형 8명, 무기징역 21명을 제외하더라도 그 외 140명의 피고인들에게 선고된 징역형량은 도합 1,650여년에 달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국외의 반향은 컸다. 한 예로 뉴욕타임스 1974년 6월 8일자는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라이샤워의 기고글 ‘비참한 길을 걷는 한국’을 싣고 “박정희의 근대 민주주의는 조지 오웰의 1인 전제정치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해야 한다”라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와 더 타임스도 유신정권의 독재와 탄압 실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해 형법 제104조의2에 ‘국가모독죄’(1975년 3월 25일 제정, 1988년 12월 31일 폐지) 신설로 맞섰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파렴치한 작태까지 연출했다. 시신마저 크레인을 동원해 빼앗아 제멋대로 화장해버린 것이다.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유일하게 인도된 이수병의 시신은 등이 타고 손톱과 발톱이 없는 시신이었다.

 

남은 유족들의 삶도 망가졌다. ‘빨갱이’ 마녀사냥이라는 공포의 나팔을 불어댄 결과 친구와 친지는 물론 형제들마저 왕래를 끊었다. 우홍선의 부인은 억울함과 분노를 이렇게 털어놨다.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 받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한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꼭 세 번씩 외쳤습니다.”

 

유족들이 “살인마 박정희”를 이 모든 악행의 주범이라고 본 것은 옳았다. 1, 2차 인혁당 사건 수사 모두 박정희의 충복들인 신직수와 이용택이 진두지휘를 했다. 1964년 1차 사건 때는 각각 검찰총장과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이었고, 1974년에는 중앙정보부장과 중앙정보부 제6국장이었다. 훗날 이용택은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일 때에는 신직수 부장과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고 털어놨다. KBS 미디어비평의 ‘오늘의 역사’는 이 사건이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에 따른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사건의 진상이 정부 차원에서 처음 인정된 것은 2005년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조사 때였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라면서 조사 결과를 부정했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소를 받아들였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진술은 고문, 구타,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32년만의 일이었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던 재판에서 자백이 허위라는 재심 판결은 이 사건이 수사 단계에서부터 재판과 사형 집행까지 모두 조작에 근거한 거짓의 살인극이었음을 국가 스스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2년 9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 판결과 관련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 부분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두 가지 판결” 운운한 것은 사실상 원심을 번복한 재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인혁당 희생자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짓이었다. 이에 대해 정성호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말로는 법질서를 세우자며 위헌적인 유신을 옹호하고, 국민통합을 말하며 사법적 판단까지 부정하는 사람이 과연 대통령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노회찬 의원은 트위터 글을 통해 “박 후보의 발언은 ‘일제 강점이 옳았는지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2)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문귀동의 구속(1988년 4월 9일)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당시 부천경찰서 조사계 형사 문귀동이 조사과정에서 여대생 권인숙을 추행한 사건이다. 1986년 6월 4일 피해자는 위장 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부천 경찰서로 연행, 문귀동에 의해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고문을 당했다.

 

1986년 7월 17일 공안당국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피해자를 “급진 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한 가출자일 뿐”이라고 매도하였고, 언론은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성적 수치심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면서 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또한 수사 결과가 발표되던 날, 문화공보부는 각 언론기관에 ‘보도지침’을 하달,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의 구체적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보도지침은 1986년 9월 6일에 <월간 말> 특집호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전두환 정권은 이를 폭로한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보도지침> 내용


-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재판과정을 보면, 검찰은 피해자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대한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대한변협은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으나, 서울고등법원(담당판사 손기식)은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피해자는 인천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도 피해자의 법정 진술을 재판장이 중도에 막는 등 불공정한 재판이 계속되었다. 결국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인 1988년 2월 9일이 되어서야 대법원은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1988년 4월 9일 마침내 문귀동은 구속되었고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실소를 자아낸 문귀동의 궤변 가운데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자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부도덕성과 인권유린의 실상 외에, 권력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인한 사법부와 언론의 부도덕한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민주진영에서도 소외되었던 여성인권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독재정권의 언론 통제 수단으로 보도지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언론의 자유와 참된 언론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이 흐름은 한겨레신문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2. 고문과 ‘우상’

 

1)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4대 우상’

 

1626년 4월 9일 사망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영국 경험론의 비조이며,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 철학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스콜라 학파의 삼단논법에 반대하고, 경험.관찰.실험에 의한 자연의 인식과 그것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목적에 방해가 되는 4개의 편견 또는 선입관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면서, 이것을 ‘이돌라’(idola, 우상)라고 불렀다.

 

진실에 대해 눈을 멀게 하는 베이컨의 4대 우상은 다음과 같다.

① 종족의 우상 :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인류의 모든 종족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사람을 오류에로 이끄는 위험한 충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표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은 사물을 그 본 모습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나오는 반사광선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는데, 인간의 지성이 꼭 그와 같다.” 인간의 지성이 이런 거울과 같다면 자연과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편견 없이 정확히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은 어렵다.
 
② 동굴의 우상 :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판단하려는 개인적 편견, 마치 우물 안에서 개구리가 넓은 세상을 보는 듯한 편견에서 생기는 독단을 말한다.

 

③ 시장의 우상 :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 없이 다른 사람 말만 듣고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는, 시장의 교제처럼 떠도는 소문을 사실로 믿는 것에서 생기는 잘못을 말한다.

 

④ 극장의 우상 : 극장에서 각본에 따른 극의 행위처럼, 사람의 판단을 잘못되게 하고 사람을 편파적으로 만드는 기존의 전통이나 권위, 잘못된 교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맹신을 말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지금은 생활상식에 속하는 베이컨의 이 경구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운 것이었다. 베이컨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늘 자기들의 이전 시대가 더 좋다며 그리워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미 흘러가버린 황금시대의 향수에 젖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접두어 ‘르(re)’에서 나타나듯이 시선을 뒤로 돌린 채 살았다. 이런 삶과 꿈의 방향을 바꾼 것이 바로 베이컨이었다. 그에게 황금시대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의미했다. 그가 창조한 진보의 관념, ‘진보의 가능성’은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 전혀 새로운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또 우상을 파괴함으로써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2) 고문과 ‘우상’, 자기합리화

 

“사상범은 민주화 인사로 탈바꿈해 보상금까지 받는데 나는 죽도록 충성을 다했건만 토사구팽이라니…. 애국도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 공산당 잡는 일은 영원한 애국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일할 때만 애국이니 국가보위나 하지 이제는 씹다 버린 껌의 신세가 아닌가.”

 

위의 인용은 자칭 회고록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2012)에 나오는, 이근안이 영화 ‘남영동 1985’를 본 후 한 말이다.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이던 1988년 12월 고문 경찰관의 표본이 되어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되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왜 애국자인 자신을 토사구팽하냐며 진심으로 억울해한다. 그래서 그의 말은 변명으로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근안이 원래 성격상 폭력성과 잔혹성의 심리를 갖고 있어서 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접근하는 것은 맞지 않다. 그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인식과 신념, 즉 빨갱이는 인간이 아닌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 또는 박멸시켜야 할 세균이라는 인식과 신념,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이념과 그에 대한 신념을 만들어낸 역사적 배경 및 정치적.사회적 조건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독재 시절 고문의 일상화?제도화는 그것을 기획하고 조종하는 주도집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문 현장에서 범죄의 체계적인 집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실행자가 필수적인 요소이다. 제노사이드(genocide)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분석한 허시(H. Hirsh)의 접근을 원용한다면, 고문의 정치적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허가(authorization)로, 고문 허가증이 발행되는 정치적 과정을 말한다. 지상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작업의 목표다. 고문 집행자의 유일한 도덕은 고문을 기획하고 허가한 절대 권위의 기대치에 얼마나 잘 부응하는가이다.

둘째 요소는 영혼 없는 일상화(routinization)의 메커니즘이다. 고문에 필요한 모든 행동과 절차를 일상화시키는 것으로, 그것은 기계화된 맞춤형 생산의 과정이자 고도로 프로그래밍된 작전의 성격을 띤다.

셋째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요소로, 이것은 파괴하고 고문할 대상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물건’이나 징그러운 ‘벌레’ 정도로 인식하게 만드는 세뇌 과정이다. 상대방을 사람이 아닌 열등생물로 규정할 때 자신의 잔혹 행위나 살상 행동은 정당화된다. 종교, 인종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빨갱이 등 이데올로기와 신화들을 동원한 기억의 정치―집단적 기억의 망각과 왜곡, 부인, 조작의 정치 및 정치적 신화의 창조―는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고문의 현장실행자인 하수인들은 자기합리화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극대화해서 활용한다.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처구니없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행위들을 넘어서서 그것들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다른 높은 차원의 목표와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합리화하면서 부조리한 행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서하려 한다.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존엄한 가치, 국가안보의 절대성이 그것이다. 노덕술―박처원―이근안으로 이어지는 고문 경찰관들에게 발견되는  ‘빨갱이라는 비인간화’ 작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고방식으로 ‘고문 메카니즘’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빨갱이 사냥’으로 상징되는 ‘맹목적 반공’은 숭배되어야 할 우상 그 자체였으며, 이 우상에 대한 맹신은 무소불위의 괴력을 자랑하면서 자기합리화?정당화의 핵심 기제로서 작동했다. ‘맹목적 반공=애국’의 등식은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극장의 우상’을 떠올리게 한다.

 

3. 박근혜와 이근안, 인권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1) 민청학련계승사업회에서 펴낸 <1974년 4월>(2004·학민사)에 보면 ‘박정희가 만년에 술만 취하면 울면서 인혁당 관련 8명을 사형시킨 것을 후회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구명에 앞장섰던 생전의 윤보선 전 대통령이 박정희 측근한테서 들었다는 얘기다.

 

대통령 후보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에 피해 입은 유족들과 사죄의 뜻을 전하기 위해 향후 만남을 갖고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해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국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며 “이제는 증오에서 관용으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남의 약속은 말뿐이었다.

 

헌법정신의 수호의지,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존중,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공명능력, 법치주의와 사법체계에 대한 이해와 신뢰, 역사 속 사건에 대한 객관화 능력 등은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꼭 지녀야 하는 덕목들이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통해 보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능력이 결손되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2) 2010년 2월 <일요서울> 기자는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자신의 과거 행적에 강한 자부심을 한껏 뽐낸다.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문 피해자의 심리상담을 통해 이근안을 비롯해 고문기술자의 행태를 잘 알고 있는 정신과 의사 정혜신(마인드프리즘 대표)은 트위터에 “이근안, 당신이 목사라구요? 예수가 통곡합니다”라며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3) 모든 고문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일단 모든 고문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고문은 피해자, 가해자 모두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그 고통과 공포는 육체와 정신 모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악몽이 항상 피해자를 불안에 떨게 한다. 고문은 외상을 남기고 고문을 받은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확산시킨다.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과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고문은 어떤 경우라도 금지되며,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세계인권선언문 제5조는 “모든 사람은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나 형벌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2002년 12월 18일 유엔 총회는 고문을 금지하는 새로운 협약을 채택하였다. ‘고문방지협약에 대한 선택의정서’가 그것으로 유엔 총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고문으로 인한 인권 유린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국제앰네스티가 전세계 인권상황을 조사하여 발간하는 <앰네스티 연례보고서 2014/2015>에 의하면, 아직까지 160개 국가 가운데 82%(131개국)에서 고문행위 또는 부당대우가 행해졌다.

 

4) 우리는 500년 전 베이컨의 우상 비판에 비추어볼 때 과연 얼마나 진보하였는가. 앰네스티 보고서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답은 회의적이다. 베이컨의 우상론은 여전히 현실적 효용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과거로의 회귀와 향수를 통해 오히려 우상의 확대재생산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상을 찾아 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보다 ‘인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그간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현대사 전 과정을 좀 더 새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인권을 넘어선 인권’이야말로 21세기 새로운 유형의 우상과 편견과 억압을 제어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이자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을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세계 곳곳을 탐사한, 그 여정의 기록인 <조효제 교수의 인권 오디세이>(2015), <인권의 풍경>(2008) 가운데 한 권을 골라서 차분히 읽어보는 게 어떨까 싶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근안 두 사람에게도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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