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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소장 칼럼

  • [작은 역사 이야기 '오늘'] 4. 4월 1일 만우절에 생각하는 ‘전쟁의 참화’와 ‘역사의 매듭풀기’

 

조현연 (진보정의연구소 소장)


4월 1일 오늘은 만우절. 가벼운 장난이나 그럴듯한 거짓말로 남을 속이기도 하고 헛걸음을 시키기도 하는 날이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왕자와 거지>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이렇게 말한다. “만우절은 나머지 364일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사는 인간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역설적으로, 가벼운 장난이나 그럴듯한 거짓말로 다뤄서는 안 되는 그런 주제를 골랐다. ‘전쟁의 참화’와 함께, 확연히 다른 삶을 살다가 간 ‘노덕술과 정순덕’이 오늘의 이야기 주제다.

 

 

1.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공포와 오키나와 전투

 

1) 일본 제국의 국가총동원법 공포 및 시행과 전시통제체제 구축

 

1938년 4월 1일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한다. 5월부터 시행된 이 법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인적자원과 물적자원 모두를 마음대로 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으로, 일본 본토는 물론 일제 강점기 조선과 대만, 괴뢰국인 만주국에도 적용되었다. 이 법은 강제징용, 징병(징병은 1943년에 시행), 식량 공출 등 일제 말기 전시통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 골격이자 각종 동원의 법적 근거가 되어, 이후 국민징용령을 비롯해 가격통제령, 조선징병령, 식량관리령, 농지관리령 등이 잇따라 발포됐다. 또한 모든 법률에 우선하여 적용되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형벌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까지 두고 있어서 조선인들에겐 사상범 탄압용인 ‘치안유지법’과 함께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숫자다. 여기에 징병, 학도병, 일본군위안부까지 합칠 경우 전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는 거의 8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2015년 1월말 다케우치 야스토가 쓴 <전시조선인 강제노동 조사자료집-연행처 일람.전국지도.사망자 명부>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는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일제의 조선인 강제연행이 이뤄진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각지로 끌려가 현지에서 사망한 조선 출신 군인.군속.근로자 등 1만 450여 명의 명부가 담겨 있다. 이는 1939∼1945년 일본과 동남아, 중국 등으로 강제연행됐다가 현지에서 사망한 조선인 전체의 3분의 1에서 5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케우치는 “한일수교 50주년인 올해야말로 전쟁 피해자들의 존엄과 권리가 회복되는 형태로 일본과 한국 사이에 새로운 합의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해 지금까지 파악한 범위에서나마 피해자 이름, 강제동원 기업과 장소 등을 적시한 책을 냄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를 기대했다”고 말했다. 또 “과거청산에 의해 민중은 역사를 획득하고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힌 뒤 “과거를 배우며 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2)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전투 발발, ‘83일간의 생지옥’

 

코드네임 ‘아이스버그 작전’(Operation Iceberg).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83일 동안 치른 전투다. 이오지마 전투를 제외하면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유일하게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자, 태평양 전쟁에서 치러진 최후의 지상전이기도 하다.

 

4월 1일 오키나와 상륙 이후 6월 말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간 오키나와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이오지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의 일본군도 애초에 미군 격퇴 같은 건 포기하고 최대한 동굴 진지에 틀어박혀 시간을 끄는 것을 택했다. 소탕전이 이어지면서 미군측의 피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6월 23일 군사령관인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참모장 조 이사무 소장이 할복자살함으로써 오키나와 전투는 막을 내렸다.

 

83일에 걸친 전투에서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와 희생을 치렀다. 일본판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 할 수 있는 후소샤판은 오키나와 전투를 거짓의 물감으로 채색하면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부추기는 영웅적 역사로 그리고 있다. 한?중?일 공동교과서인 <미래를 여는 역사>에서 우리는 사라진 진실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오키나와 현 자료를 인용해, 미군 1만2500명, 일본군 9만4000명, 주민 9만4000명이 전투 중 사망했고, 이후 말라리아 지대에 강제 이주돼 사망한 사람도 수만명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사람이 폭탄을 안고 돌격한 특공대가 가장 많이 투입된 전투”라는 설명도 덧붙이면서,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고 밝히고 있다.

 

전투 내내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하여 수많은 무고한 오키나와 주민이 희생당했으며,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에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중 대부분이 발연탄 사용으로 인한 독가스로 사망했다. 발연탄은 사용이 금지된 생화학무기는 아니었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독성이 너무 강한 탓에 사상자가 나온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오키나와에 세워진 ‘평화의 주춧돌’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23만9209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져 있고, 이 가운데는 한국인 341명, 대만인 28명 등의 이름도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무려 1만명이 (오키나와로) 끌려와 진지구축과 탄약운반에 동원됐고, 100개가 넘는 오키나와의 군 ‘위안소’에 조선 여성 다수가 일본군 위안부로 수용됐다”고 적고 있다.

 

2. ‘유럽 최후의 파시스트’ 프랑코 총통과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

 

1) 1939년 4월 1일 스페인 내전, 공화국 정부의 항복선언

 

스페인 내전은 1936년 공산당과 기타 좌파의 연합세력인 인민전선의 집권에 위기감을 품은 스페인 우파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의 정치는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지만 다양한 성향의 세력들로 나뉘어 있었다.

 

1936년 2월 총선 결과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였다. 의회를 장악한 인민전선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스페인의 지주와 자본가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마침내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고,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항복함으로써 프랑코와 반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 전 지역은 황폐화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해 공화파는 “폭정이냐 민주주의냐”를 놓고 벌인 싸움으로 보았다. 반면 프랑코파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등 ‘빨갱이’들로부터 재산권을 보호하고 사회 안정을 회복하며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여 무정부상태의 무법천지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주장하였다. 프랑코파를 지지한 사람들은 가톨릭 성직자, 지주, 기업가, 그리고 파시스트 군대에 병력을 제공한 바스크 지방 외곽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반면 공화국 정부의 지지자들은 대도시 노동자, 소작농, 고학력 중산층들이었다. 특히 공화국 정부는 자산이 없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공화파 정부의 태도에 대해 노엄 촘스키 교수는 이렇게 비판한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스페인 공화국의 정부는 마비상태였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으로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는 군사반란만큼이나 무장한 노동자 군대를 두렵게 느꼈기 때문에 반란군의 손에 희생당하는 그들을 방관하였다. 항구에는 정부의 군함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결과 반란군은 스페인 전역을 점령하였고 결과적으로 정부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반파시즘 진영인 인민전선을 소비에트 연방과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여단이 지원하고, 프랑코파를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 그리고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지원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양상을 띠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국 정부에 군수 물자를 지원하였으나 국제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이유로 스페인 정부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공화군 측에는 비행기를, 프랑코 측에는 가솔린을 팔았다.

 

내란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또한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의 반란군이 집권하자 대대적인 숙청과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최소 30,000명에서 50,000명이 처형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다. 전쟁 후 프랑스로 피신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에 달한다. 스페인 내전의 주역으로 권좌에 오른 프랑코는 1947년 왕위계승법을 제정하여 스페인을 <왕국>으로 만들고 스스로 국가원수로서 왕국의 종신 섭정이 되어 자신이 국왕후계자의 지명권을 갖는다고 정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종신 국가원수의 자격을 얻은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1인 철권통치를 펼쳤다.

 

스페인 내전은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는데,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등은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내전에 직접 참전한 사람들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던 1937년 4월 26일, 나치가 바스크 족의 수도인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을 담은 그림이다.

 

2) 2001년 4월 1일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 체포

 

유고슬로비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티토(Josip Broz Tito)라는 빨치산 출신의 걸출한 지도자에 의해 6개의 이민족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국가다. 티토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분열은 없었으나 티토 사후 유고 연방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으로 분열되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는 1989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유고연방의 대통령으로서 여러 민족이 혼재한 유고연방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 왜곡된 민족주의 정책은 유고에 필연적으로 내전이라는 유혈사태를 불러왔으며, 연방 종주국임을 자처한 세르비아계에 의한 인종말살이 자행되었다. 1991년부터 1995년 사이에 벌어진 크로아티아 내전에서는 20만명이 사망했고,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에서는 10만명이 사망하였다. 또 1998년 야기한 코소보 사태에서는 1만명을 사망하게 했고, 이른바 ‘인종청소’를 벌인 결과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 85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었

다.

 

이런 인종청소라는 대량학살 행위로 밀로셰비치는 ‘발칸의 도살자’라 불렸고 결국 2000년 민중봉기로 실각하였다. 1999년 5월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의해 전쟁범죄와 학살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2001년 4월 세르비아 특수경찰에 체포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송되어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밀로셰비치 재판은 복잡하고 오래 걸렸다. 밀로셰비치는 변호인단 선임을 거절하고 스스로 자신의 변론을 맡았으며, 동시에 법정 자체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유죄 인정을 거부했다. 결국 2006년 3월 11일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밀로셰비치 지지자들은 NATO의 독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국민 대부분은 밀로셰비치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3. 남북의 군사적 긴장과 ‘북으로부터의 위협’

 

1) 4월 1일은 ‘향토예비군의 날’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직장마다 피가 끓어 드높은 사기…” ‘1·21사태’가 일어난 1968년 4월 1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250만명의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향토예비군은 남북의 군사적 긴장과 대치라는 극한 상황의 산물이었다. 북한은 군사력 증강의 기본방향으로 1962년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을 내걸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전 인민의 무장화’와 그에 따른 노농적위대의 조직 확대(142만명)였다. 북한은 종래 사회안전부의 지휘를 받던 자위대를 해산하고 1959년 1월에 노동자, 농민, 제대군인, 학생 등 약 50만명으로 노농적위대를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으나 전인민의 무장화 정책에 따라 18~45세의 남자와 18~35세의 미혼 여성까지 편입시켜 조직을 확대한 것이다.

 

1968년 1월부터 북한은 본격적인 도발행위를 시작했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무장공비를 침투시켰고(1.21사태) 동해에서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1차적으로는 무장공비와 간첩을 지역별로 방어하고, 유사시에는 향토방위와 후방지역 통제 등을 위해 향토예비군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부터 매년 4월 첫째 토요일에 ‘향토예비군의 날’ 기념식을 치르게 되었다.

 

정부여당의 향토예비군의 정치적 이용 등으로 논란이 되고, 국민의 생업에 큰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야당에 의해 향토예비군 폐지나 기간 단축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워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다. 향토예비군 창설 44주년을 맞은 2012년 4월 “냉전과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고 20~30대에게 사회적·사상적 자유 등 국민 기본권을 돌려주기 위한” 예비군 제도의 단계적 폐지라는 통합진보당의 입장 발표는 한때 온라인상에서 뜨거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편 이사 후 제때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대거 전과자가 양산되던 시절도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진행된 헌혈과 불임시술이 국민건강과 가족계획에 기여하기도 했다는 평도 있다.


2) 1993년 4월 1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북한 핵문제 유엔안보리 회부

 

1985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함으로써 북한 내의 특정핵물질 및 원자력 시설에 대하여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보고하고 또한 IAEA의 사찰을 수용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91년 1월 남한과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하였고, 북한은 1992년 1월 IAEA의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였다. 1992년 5월 북한은 핵시설에 대한 최초보고서를 IAEA에 제출하였고 이에 따라 1992년 5월 하순부터 신고시설들에 대한 IAEA의 임시사찰이 실시되었다. 핵사찰 결과와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 불일치하자 IAEA는 이를 문제 삼아 영변 핵 단지의 미신고 된 2개의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였다.

 

1993년 북한은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거부하고 NPT 탈퇴를 선언해버렸으며, 이에 IAEA가 북핵 문제를 UN 안보리에 회부함으로써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만 핵을 보유할 수 있는데다 미국에 우호적인 인도, 이스라엘 등의 핵 보유는 간섭하지 않는 NPT 체제가 근본적으로 불공평하며, NPT 제10조에 보장된 탈퇴의 자유를 행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인도, 이스라엘, 남아공 등의 핵 보유는 NPT 비가입 국가들의 일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NPT 가입국이 핵 개발을 비밀리에 진행한 예는 북한이 처음이었기에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 긴장도가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또 북한이 가장 예측 불가능한 국가로 거론되는 상항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NPT 탈퇴선언 후 북한과 미국 간에는 심각한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클린턴 정부는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검토하는 등 상황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특사 형태로 대화를 시도하면서 양국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북한은 NPT 탈퇴를 유보하였다. 북·미고위급회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양국 간의 회담 끝에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제네바 기본합의서의 핵심은 북한 핵개발 사태로 조성된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2003년까지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고 대신에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영변 핵발전소를 폐쇄했으며, 건설 중이던 다른 원전시설도 중단하였다. 또한 핵 재처리 포기, 방사화학실험실 폐쇄 등 핵 동결 조치를 취했다. 또한 북한에 대한 한국형 경수로지원 및 대체에너지 제공 등을 추진하기 위한 국제기구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출범하여 경수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북한의 탈퇴문제는 해소되었지만 북핵 위기는 그 뒤로도 재연되었다. 2002년 10월 17일 ‘제2차 북핵 사태’(미 국무부가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방북시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시작) 발발을 거쳐 마침내 2006년 북한 핵실험에까지 이르게 된다.


4. 반공투사 ‘고문왕’ 노덕술과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1) 반공투사 ‘고문왕’ 노덕술

 

1968년 4월 1일 ‘고문왕’ 노덕술(일본식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이 사망하였다. ‘친일 고문경찰=노덕술’이라 할 정도로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악질적인 친일 고등계 형사로 악명을 떨쳤다. 노덕술은 경남지역의 여러 경찰서와 서울 종로, 인천, 개성경찰서와 평남 경찰부, 경기도경을 거치면서 사상범, 즉 항일투쟁을 벌였던 인물들을 주로 다뤘다. 말하자면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은 일제의 주구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원래 업무 외의 사건에도 개입해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주로 물고문이나 구타 등 잔혹한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출감한 후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독립운동가가 부지기수였다.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1월 반드시 처벌해야 할 친일파 1호로 지목된 노덕술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여전히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친일경찰은 국민들의 공적 1위였기 때문이다. 체포당하기 전에 노덕술은 다른 친일경찰들과 반민특위 간부 암살이라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사건은 암살자로 고용된 백민태가 서울지검에 자수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반민특위 간부 등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이들이 월북하려고 해 사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노덕술 체포에 가만히 있을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경찰들이 아니었다. 공개된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정부가 보증을 해서라도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관계자를 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시달했다. 이에 앞서 노덕술의 후견인인 장택상(전 수도경찰청장)과 김태선(시경국장)은 이승만을 찾아가 ‘뛰어난 고문기술자’인데다 좌익세력 색출에 남다른 기술을 갖춘 노덕술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이승만과 장경근(내무차관)의 주도 아래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결국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 복귀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경찰직 고위간부,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등을 맡으면서 호사를 누렸다.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울산 중구에 출마한 노덕술은 2000여표로 꼴찌를 차지했다.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1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노덕술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2014년 울산시가 울산 정명(定名) 600년 기념사업으로 추진 중인 <울산의 인물> 자료집 발간을 앞두고 공청회에서 587명의 명단을 발표하면서다. 친일경찰의 대명사이자 고문기술자인 노덕술을 울산을 빛낸 인물에 버젓이 포함시킨 것이다. 기가 막힌 것을 넘어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2)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2004년 4월 1일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사망했다. 1950년 10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했으나,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도왔던 남편이 대한민국 국군을 피해 조선인민유격대에 입대하면서 결혼 몇 달 만에 헤어지게 되었다. 1951년 2월에 남편을 찾아 겨울옷을 챙겨들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20여 일 동안 같이 지내다가 남편이 사망하자 유격대에 합류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1963년까지 체포되지 않아 ‘마지막 빨치산’으로 기록됐다.

 

체포된 이후 정순덕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대구, 공주, 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85년 8.15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노동자로 오래 전전하다 1995년경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에 기거하면서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1999년 3월에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후 반신불수의 상태가 되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그때까지 비전향으로 남아 있던 장기수들이 북한으로 송환될 때 정순덕은 양심선언을 했다. 정순덕은 과거 자신의 전향은 고문과 강요가 동반된 전향공작에 따라 전향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은데 불과했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향이 경남 지역이고 전향서를 쓴 적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송환은 성사되지 않았다.


3) 전향공작의 실상

 

정순덕의 양심선언에 등장한 전향공작이란 게 뭘까? 전향공작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공공연하게 실시됐으며 박정희 군정 하인 1963년 4월 3일 법무부장관 명의의 ‘좌익수형자의 사상전향 심사방안’이 마련됨에 따라 처음으로 공식법규가 됐다. 체계적인 전향공작은 1973년 3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전향공작전담 교회사’를 공개채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초급대졸 이상 학력 기준에서 채용된 사람들은 사상범(양심수)이 있는 광주, 전주, 대전, 대구교도소에 배치돼 교무과 지도하에 전향공작업무를 진행했으며 이들은 교도소마다 파견된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에 의해 관리됐다.

 

1973년 8월 2일자 법무부 예규인 ‘좌익수형자 전향공작 전담반 운영지침’에는 중앙정보부에 관한 사항이 나타나있지 않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중정에서 담당했다. 특히 전담반에는 공개채용된 사람 외에도 살인.강도.상해범들이 포함됐으며 이들은 전향공작에 협조한 ‘공적’으로 일찍 출소하는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대전교도소에서는 1973년말~74년초와 1986년 전후 두 번의 집중적인 전향작업이 진행됐는데 당시 전담반에서 활동하던 한 사람은 10여년 동안 비전향장기수를 포함, 1천여명의 ‘좌익사범’을 전향시킨 공로로 법무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고문은 흉악범 2-3명이 들어있는 방안에 사상범 1명을 넣어 바늘 수백개가 박힌 침목으로 온몸을 찌르고, 겨울에 얼음 위에서 잠을 재우는 것에서부터 물고문.고추가루 고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방법으로 진행됐다. 전향 강요에 항의해 단식에 들어간 비전향자들에 대해서는 ‘강제급식’이라는 명목으로 입 안에 호스를 박고 소금물을 들이붓는 방식의 고문도 했다. 전향공작은 주로 교도소 내 격리사동에서 따로 이뤄졌으며  교도소 측은 이런 전향공작과정을 감시카메라를 통해 지켜봤다고 한다. 전향공작의 가혹성은 공작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전인 1973년초 500여명에 이르던 비전향장기수들이 공작이 시작된 후 200여명으로 줄어든 데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유신독재정권의 교도소내 체계적인 사상전향 공작과정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상습폭력과 고문으로 사망했다. 중앙정보부와 법무부의 경우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은폐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향공작은 비전향 장기수 외에 경미한 반공법 위반자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사상전향 제도는 위헌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오다가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 때 비로소 폐지됐다. 대신에 준법서약서를 작성하는 제도가 신설됐지만 이 역시 2003년 7월 폐지됐다.


5. 맺음말 : 잘못된 역사에 대한 기억하기?매듭풀기

 

1) 2015년 2월 23일 55세 생일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나루히토 왕세자는 올해 전후 70주년을 맞는 것과 관련,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나가는 게 중요하다”, “(일본 내에서) 전쟁의 기억이 흐려지고 있다”며 “겸허하게 과거를 뒤돌아봄과 동시에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부터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 비참한 체험과 일본이 걸어온 역사가 올바르게 전달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덧붙여서 “우리나라는 전쟁의 참화를 거쳐 전후 헌법을 기초로 노력을 쌓아올려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며 “전쟁의 참혹함을 두 번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과거의 역사를 깊이 인식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전쟁의 기억’과 ‘평화’를 재차 강조한 것은 최근 아베 신조 정권이 보수 우경화, 군사 대국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해 일정 부분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는 특히 일본의 우경화에 따라 한국·중국과의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걸 의식한 듯 “여러 외국과의 우호를 확실한 것으로 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 2014년 5월 22일 박정희 정권 당시 사상전향 공작에 견디지 못하고 옥중 사망한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정부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5부(이성구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돼 수시로 사상전향 심사를 받다가 옥중에서 끝내 숨진 고 권오금 씨 등 희생자 4명의 유족 8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총 5억9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사상전향 제도는 수형자들의 사상적 판단에 대한 표현을 강제하는 것으로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 행위”라며 “정부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상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3)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의 발언과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 걸까. 2008년 5월에 쓴 한 보고서에 쓴 내용을 인용하면 이렇다. “미래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현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깊숙이 이어져 있으며, 따라서 과거가 만들어놓은 잘못된 매듭을 제대로 풀지 않고서는 아무리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가려고 해도 더욱 그 매듭을 꼬이게 할 뿐 허사가 되고 만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이 낡은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로 전진하는 데 역사적 진통이 따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진통이 두렵거나 고통스러워서 갈등을 덮은 채 원칙 없이 화해나 화합이라는 길로 나간다면, 그것은 정의의 실종과 도덕적 가치의 상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한 까뮈(A. Camus)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 프랑스의 문호 사르트르(J. P. Sartre)도 “과거청산의 부재는 곧 존재해서는 안 될 것과 존재해야 하는 것의 공존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이런 청산의 부재와 모순의 연장 속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실종되고 사회 정의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4)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시행에 따른 희생과 피해, 반공투사 ‘고문왕’ 노덕술의 삶, 전향공작의 살인적인 고문과 손해배상 판결 등에 대해 과연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어떤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을까? 박근혜 정부의 집권 2년 동안의 행태를 보면, ‘만우절용 립서비스’도 나올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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