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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대문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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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는 해롭다. 여성혐오라는 개념도 해롭다. 


(출처: 정의당 당원게시판, 글쓴이: 류호성90) 

당게 내에서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메갈논쟁은 다른 많은 문제 때문에 조금 묻혀버린 철지난(?) 논의인 것 같지만, 늦더라도 또 하나의 목소리를 보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아주 긴 글이지만, 여러 번 끊어서 쓰기보다 한 번에 올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긴 글이지만,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어릴 때부터 책과 글을 좋아해서 대학에서 인문학, 구체적으로 철학을 전공하였고, 메갈에 대해서는 정의당과 같은 정치권 영역의 사람들의 반응이나 태도보다는, 메갈이 스는 ‘여성혐오(misogyny)’라는 개념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다른 걸 떠나서 구체적으로 ‘여성혐오’라는 ‘개념’에만 관심을 기울이려 합니다. 다른 사회적인 양상, 정의당 내부의 갈등 관계, 메갈과 ‘꿘’의 관계, 여성이나 남성이 차별받는 실태, 메갈 같은 부류가 사용하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의 정당성 여부 등에 대해서는 잠시 판단을 중지한 상태에서요. 메갈과 같은 공격적 여성주의자들 외부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저는 주로 그런 이들이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불러일으키는 방종과 무책임함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제목을 자극적으로 붙였지만, 저는 제목대로 여성혐오라는 개념 그 자체가 해롭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방식이 다소 거칠고, 산만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애초에 이 개념 자체가 그렇게 소비될 가능성을 많이 떠안고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성 차별과 갈등을 다루는 뭇 글들과 이야기들의 첫머리가 아니라 결론부 오는 게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을 다룰 때 이 표현이 갖는 지배력이 많이 줄어야 하며, 대신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국내의 많은 전투적인 여성주의자들이 여성혐오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어를 너무 섣불리 자신들의 이야기 제일 첫머리에 박아 넣음으로써 이후에 전개될 논의들의 질을 많이 떨어뜨려 버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 까요. 먼저 여성혐오라는 개념의 ‘정의’를 찾아봅시다. 여성혐오란 무엇입니까? 이 게시판에 ‘정의 공정 화합’님이 남겨주신 “여성혐오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에서 찾아보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여성을 마치 이 주류에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타자화 하여 말을 하고, 직설적으로 여성을 멸시, 비하하는 것 이다. 즉 여성차별과 굉장히 밀접하지만 보다는 더욱 비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해당 글에서 작성자 분이 이야기하는 바는, 여성혐오를 중지함으로써 남성적 시각에 의한 객체화, 타자화를 멈추고 여성들이 그저 하나의 자기결정권을 가진 주체이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시각으로 판단하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인 관심을 갖길 거부할 수 있는 이들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위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여성혐오’ 개념을 들먹이며 ‘계몽’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가, 실은 그들이 하는 훈계조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며, 어떠한 새로움도 안겨다 주지 못합니다. 전투적 여성주의자들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많은 여성운동들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파심에 이야기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점잖은(?) 운동에서 사용된 표현을 메갈과 같은 과격한 표현으로 바꾸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구호가 “예수 안 믿을 거면 당장 지옥으로 꺼져버려라! 이 사탄의 자식들아!” 정도로 바뀐 걸로 밖에 안 보이거든요.)
 
저는 사실 여성운동가들이 여성혐오와 같은 개념을 다룰 때 먼저 그 의미를 사전적으로 정의해놓고 그 다음에 그것을 세부적인 영역으로 적용하려는 접근이 어쩌면 잘못된 접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투적 여성운동가들은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왔죠. 그러나 사실은 지금껏 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성혐오에 대한 엄밀하고 합의된 정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개념이 제대로 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사를 통틀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박대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성혐오라는 개념 하나로 그러한 많은 현상들을 퉁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개념의 의미는 대체로 사람들이 그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어떤 영역에서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요즘 온라인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보이고 있는 여성혐오라는 표현의 ‘사용’이 위에서 제시된 ‘여성 타자화’라는 여성혐오 개념의 ‘정의’ 안에 포함되고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분명히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타자화 되거나 차별받는 많은 현상은 있지만, 그 현상들을 하나로 아울러 엮어내려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은 결국 영양가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정의내리는 방식은 결국 그 정의를 통해 이루려는 목적이나 방향성을 지시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곤충이라는 개념은 벌레라는 개념보다 더 학술적인 방식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곤충들 간의 연관관계와 같은 생물학적 연구에 유용하지만, 벌레라는 개념은 그보다 일상적인 맥락에서 정의되기 때문에 거미나 지렁이 같은 녀석들도 포함하고, 걔네들까지 아울러 지칭하는 데 편리하죠.) 물론 여성혐오라는 개념도 굳이 정의하려면 정의내릴 수 있겠죠. 그러나 그 방식은 결과적으로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실제적 삶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붕뜬 정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밖에 정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나로 일원화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수많은 현상들, 사건들, 가치관들을 그 구체적인 맥락과 내용들은 잘라 내버리고 그 안에서 어떠한 공통점(예컨대 여성에 대한 타자화)만 추려내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 말고는 가능하지 않아요. 사실 이런 방식으로 내려진 정의는 그저 ‘사전에 실리기 위한’ 정의일 뿐, 구체적 삶의 복잡한 맥락 속에서 실천적으로 사용되는 데 부적합 합니다. 애초에 여성운동가들이 실질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방위로 노력하는 동안 깊이 잠들어 있어도 상관없는 개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전적 개념을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실천적으로 활용하고자한다는 것입니다. 원천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개념을요.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일단은 구체적이고 일회적인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니까요.
 
좀 더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첫번째로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애초에 하나로 뜻이 모아진 개념조차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기초적인 단계의 논의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구요. 앞서 말했듯 사람들이나 집단들이 여성혐오 개념을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씀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목적도 바뀌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반대로 실질적으로 사람들이나 집단들이 원초적으로 다른 목적과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게 되는 게 더 맞는 것 같네요.
 
두 번째로 이 개념은 단일한 원칙과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너무 많은 현상을 포괄하려고 하는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됩니다. 여성혐오는 단일한 원칙과 방법론, 방식을 통해 정의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여성혐오가 만연한데, 내가 모든 여성혐오 현상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단일한 지침과 원칙을 제시할테니 가서 여성혐오를 그 지침과 원칙에 따라 제거하고 오라”라고 주문한다면, ‘단일한’ 지침과 원칙으로 여성혐오라 이름 붙여진 갖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품평문제, 김여사와 같은 지칭들, 데이트 폭력, 스토킹, 성폭력 문제들이 정말로 하나의 동일한 원칙과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가요?
- 서로 다른 방식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예컨대 기성세대가 느끼는 유교식 당위에서 비롯된 성차별적 질서의식과, 젊은 남성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분노는 그 결이 애초에 다르며, 그러한 사람들이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사회운동을 할 때,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그 운동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화 할 수야 없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많은 사회운동들이 별로 대단하지도 않고 실천적이지도 않은 개념에 집착하다가 그 생생하고 예리한 비판정신을 잃고 와해되어 버린 경우가 많죠.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들이 주로 사회에서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실천적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개념의 이러한 성질은 사실 치명적이죠. 추상적인 개념, 그러니까 추상적인 ‘관념’은 오직 이 세계의 관념만을 공격했지 결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마르크스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자기 입장을 전개한 바 있죠.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전제는 ... 현실의 개인들 및 그들의 행위이며, 또한 이미 존재하는 것과 그들의 행위를 통해 산출된 것을 비롯한 그들 생활의 물질적 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들은 순전히 경험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확인 될 수 있을 뿐이다.”(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안타깝게도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일종의 추상적인 전제가 되어버리면서 “현실의 개인들 및 그들의 행위”를 벗어나버린 관념적 영역에서 논의되는 것 같습니다. 남아나는 메시지가 “여성혐오는 안 돼!” 밖에 없어요.
 
이런 상황은 사실 흔하죠. “지역감정을 없애야 한다!”와 같은 구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구호만 외친다고 자동적으로 사람들이 지역감정을 그만두고 서로 화합하길 바라는 건 기적을 바라는 일이죠. 구체적으로 지역감정 청산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며, 더 나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선 심층적으로 왜 지역감정이 일어나는 가 이해할 필요가 있죠. 실제로 과거 여성운동은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곤 했습니다. 메갈리아 등지에서는 이들의 운동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격하하곤 하지만, 예컨대 호주제 폐지와 같은 뚜렷한 성과는 구체적인 문제인식 이후 구체적인 분석적 관찰을 거쳤다고 들은 바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체감하게 되는 어떠한 불합리함,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고자 한다면, 그 감정을 일으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구체적 삶과 사회의 맥락 속에서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통계도 활용하면서 이에 대한 분석적 관찰이 필요하구요. 이미 주어진 통계는 그 액면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구체적인 시각에서 그러한 통계치가 나오게 된 원인을 탐색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실질적 해결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이르고 나서 여성혐오에 대한 경고를 덧붙여도 늦지 않아요. 문제는 메갈 등지에서 본인들의 불편한 감정을 이야기 할 때 첫 번째 단계에서 출발하여 마지막 단계로 순식간에 곧장 도약해 버린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개인적 경험과 그에 따른 감정, 판단에서 출발하여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도달한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소비되고 말지요. 구체적 인식도, 심층적 분석도, 그에 따른 구체적인 해결방안도 없습니다. ("현상x 때문에 내 기분이 불편하다" -> "현상x는 여성혐오다" -> "여성혐오는 나쁘기 때문에 현상x를 금지해야 한다!") 사실 현실적인 문제를 전문적인 시각에서 해결할 능력이 안 되니까, 이들은 고작 온라인상의 과격한 표현을 틀어막는 데 온 역량을 동원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거는 상대적으로 무식한 물량공세로 틀어막을 수 있는 일이거든요. 반면 여성혐오 개념으로 야심차게 해결해 보고자 했던 많은 문제들(품평문제, 술 시중 강요, 성추행 등등)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추행 등의 범죄는, 그걸 해결할 의지를 가진 집단이 고작해야 "여성혐오는 안 돼! 재기해라 이기야!" 정도의 메시지만 갖고 있다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요.
 
사실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부터 경험적이지 않습니다. (경험적이란 말은 “내가 생생하게 체감했다”라는 의미보단, 구체적인 관찰 과정을 통해 분석되었다는 말입니다.) 여성혐오는 애초에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이 구체적인 맥락을 따라가며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개념을 사용하는 데에는 한도가 없지요. 어디까지가 여성혐오고, 어디까지가 아니라는 구획이 원천적으로 무의미합니다. 솔직히 인문학도로서 배운 바가 있다면 ... 오늘날의 인문학자들 중에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기 보단 그냥 마음이 가고 끌리는 개념어나 이론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개념이나 이론의 의미와 내용을 나중에 원하는 대로 덧붙여 씌우곤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자면, 동아대 국문과 권명아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게시판에 올라왔네요.)
“올해 광복절에도 어김없이 광복 기념 ‘여자 패기’는 이어졌다.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 축사에 대한 공분은 여성 연예인 티파니 두드려 패기로 전가되기도 했다. 대통령이라는 ‘거대권력’에 맞서지 못하는 무기력과 좌절이 만만한 다른 내부자를 찾아 공격적으로 이동하고 증오를 이전시키는 방식은 냉전 남성성이 기생하는 여성 혐오를 반복한다. 다른 한편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정권 비판과 여성 혐오적인 풍자가 뒤섞이면서 권력 비판의 이름으로 여성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 냉전 남성성과 여성 혐오의 연계는 대안 이념이 부재한 보수파의 통치전략과 연결되는 경향이 강했으나, 이제 이 대열에 진보진영도 합류하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진보진영이 냉전기 보수 집단의 통치성의 근간인 여성 혐오를 반복하는 건 흥미롭다.”
 
냉전 남성성이 기생하는 여성 혐오 같은 소리는 이해하기 너무나도 쉽습니다. 아마 다들 머릿속에서 대강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서 연결되겠죠. 그러나 사실 저 진술 자체가 전반적으로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이 부재합니다. 애초에 표현하는 개념어들 자체가 경험적 관측이 힘든 애매모호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네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서 저걸 설득력 있게 해주는 구조로 알아서 짜 맞춰 줄 테니까요.
 
그러나 대관절 저게 무슨 엉뚱한 소리란 말입니까? 대통령이라는 거대권력에 대한 공분이 그대로 대통령에게 향하지 못하고 여자 연예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그럭저럭 설득력 있고 그럴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교수님 본인을 포함하여 누구도 객관적으로 검증한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검증하려는 시도조차 없었지요. 뭐 검증해보라고 하면 인터넷 사이트 몇 군데 들어가서 샅샅이 뒤진 끝에 그럴싸해 보이는 덧글 몇 개를 발견해서 제시하겠지만... 게다가 만일 실제 경험적 관찰을 시도한 결과 저 진술과 실제 상황이 어긋나면 “원래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무지하고 감성 없는 당신들이 잘못 이해했다!”하며 슬그머니 의미 해석을 바꾸곤 하겠죠. 여성혐오 개념이 사실 이러한 자율적인 의미부여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특히나 인문학적 개념 대해 진지하고 합리적인 성찰이 없는 이들이 이러한 자율적인 의미부여의 위력을 손에 쥐게 되면 참혹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메갈과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죠. 여기 게시판에서 어떤 분이 “정의당이 대중정당으로 나서면서 전통적 운동권이랑 상관없는 일반 대중들이 많이 가입했고, 그러면서 진보적 여성문제를 제대로 이해 못한 여성혐오적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이 들어왔다”라고 주장하는 글을 보았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확하게 메갈리아에 적용하면 들어맞습니다. 사실 진보정당보다야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하는 게 부담이 훨씬 적거든요.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이든, 진지한 문제의식 없는 숱한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메갈도 마찬가지에요. 이들은 마치 손 안에 들어오는 찰흙처럼, 일견 학술적인 권위가 있어 보이는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마음껏 주물럭거릴 수 있게 되었죠. 개인적인 인상은 이렇게 되면서 여성혐오 개념이 “창조경제”와 유사해졌다는 겁니다. 두루뭉술하고 애매하게 정의한 후, 원하는 구체적인 사례에다 아무렇게나 적용하고 나중에 그 사례와의 관련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덧붙여버리면 그만이죠. 이렇게 하나의 소설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는 겁니다.

이 개념이 너무 지나치게 오남용 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우려합니다. 애초에 어떤 것이 여성혐오이며, 어떤 것은 여성혐오가 아니라는 어떤 구체적 기준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내 마음에 안 드는 거에 무차별적으로 여성혐오 딱지를 붙이더라도 누군가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원한다면 메갈리아 그 스스로에게도 여성혐오 딱지를 붙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워마드 하는 학우와 메갈을 하는 학우가 서로의 마인드를 여성혐오로 규정하고 다투는 걸 본적이 있어요. 제가 알기로도 메갈리아 계통은 여성시대/메갈리아/워마드/메갈리아4/레디앙/우민끼 등으로 복잡하게 분열되었습니다. (솔직히 구체적으로 뭔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느끼기에 여성혐오인 것처럼 보인다면, 분명히, 틀림없이 여성혐오인 게 확실해지고, 더 이상 그거에 대해 새로이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어보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다르게 생각하거나 무감각하게 행동한다면, 그 사람이 잘못 판단한 게 되죠. 무엇이 여성혐오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부터가 애초부터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내가 보기에 분명하게 여혐이 만연해 보이는데, 저 가증스러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게, 너무나도 분통이 터지게 될 겁니다. 여기에다 “사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권력관계이며, 모든 현상은 미시적 권력이 작동한 결과이다.”라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선험적 진술이 끓는 기름을 쏟아 부으면, 훌륭한 음모론을 하나 완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약자인데, 저 권력을 가진 집단이 권력상의 우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를 박해한다.” 같은 식으로요. 이런 식으로 그간 여성혐오에 무감각 했던(?) 이들을 권력을 틀어쥐고 약자를 짓밟는 악마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천국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지옥에 기득권이 있는 악마의 악의이다” (포퍼, 추측과 논박) 이런 방식으로 그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악의로 가득 찬 한남충, 흉내자지, 꿘 (더 나아가 좌빨, 수꼴, 홍어, 통수, 알밥, 흉노족, 김치녀 등등으로) 만들어버리게 되는 거지요.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은 여성혐오 개념은 분노한 무리의 결집 이상의 다른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다 붙여도 여성혐오는 붙일 수 있죠. 메갈리아 계통의 계속되는 분열을 보면서 느낀 건, 여성혐오와 같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개념에만 기초해서 무언가 실천을 하고자 하는 순간, ‘우리도 틀릴 수 있다’라는 생각이 원천 봉쇄되어 불가능해진다는 겁니다. 그냥 내 머릿속에 떠오른 논리, 내 감정에 따라 이끌린 논리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되고, 그것을 반증하는 어떠한 경험적 근거가 나오더라도 그냥 “당신은 빻아서 내 말을 발톱만큼도 이해 못한다!”라고 말하면서 좀 더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여성혐오의 의미를 은밀히 바꿔버리면 그만이니까.
 
구체적 사회와 삶의 맥락을 분명히 관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개념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손쉽게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실제로 내가 갖고 있는 여성혐오 개념의 정의와 일치하는 지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먼저 “사건 X는 여성혐오다”, “사건 Y도 여성혐오다”라고 선언하고 난 뒤에 나중에 끼워 맞춰도 되니까요.
예를 들어서 아무런 진지한 고찰 없이 무한도전을 여성혐오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왜 남자들만 출연하는가?
- 여성혐오임에 분명하다!
- 왜 남자들이 좋아하는 액션물에 집착하는가?
- 여성혐오임에 분명하다!
- 왜 여성혐오로 가득 찬 힙합음악을 끌어들이는가?
- 여성혐오임에 분명하다!
- 왜 예쁜 여자 연예인이 출연하면 패널들이 환호하는가? 여자는 꼭 예뻐야 하는가?
- 여성혐오임에 분명하다!
등등의 과정을 거쳐 무한도전을 훌륭한 “여혐물”로 탈바꿈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여혐이 아닐 수 있는 이유”, 예들 들어 힙합음악을 소재로 삼은 건 그냥 힙합이 인기가 많아서 그랬을 뿐, 다른 이유가 없었다는 게 밝혀지더라도, 거기에 대해 또다른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내면 됩니다. “근본적으로 왜 힙합 같은 여성혐오적 음악이 유행하는가? 사람들의 인식은 왜 그 따위인가! 역시나 우리 사회는 여성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것이 여성혐오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무한도전 역시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내 말이 옳다!” 등등. 애초에 메갈 등지의 논리는 너무나 편리하게도 입이 막힐 때 마다 “사실 세상 만물이 여성혐오적이다!”라는 필살기를 끄집어내기 때문에 그 어떤 사달이 나더라도 여성혐오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너무나도 쉬워집니다. 물론 저런 식의 전제는 애초에 여성혐오 개념의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비경험적인 성질 때문에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한 마디로 말해 논리적으로는 의미 없는 진술이지요.

이런 방식으로는 사실은 여러분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실은 달에 사는 외계인이 지구인을 관찰하기 위해 보낸 첩자라는 해괴한 이야기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 왜 고양이는 가끔씩 나를 감시하듯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지?
- 그건 사실 그 고양이가 너를 관찰하여 달로 전송하고 있기 때문이야.
- 왜 우리집 고양이는 가끔 멍청한 짓을 하지?
- 그건 사실 고양이가 실은 아주 똑똑한 첩자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그러는 거야.
- 왜 이웃집 고양이는 며칠 전 집을 나갔을까?
- 그건 때가 왔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관찰할 결과물 갖고 달로 돌아간 거지.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반박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고양이는 달에서 외계인이 보낸 첩자다”라는 논리가 비경험적이고 객관적 관찰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다면요.
- 고양이가 어떻게 달로 정보를 전송한단 말이지? 우리 고양이는 그런 전송장치가 없는데?
- 그건 그 고양이 뇌 속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야.
- 어제 동물병원에서 X-Ray를 찍었는데 그런 장치는 없던데?
- 그건 그 장치가 사실 생물학적인 물질이라 일반적인 사람들이 관찰할 수 없는 거야.
-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 너 참 빻았구나? 나는 항상 그걸 가슴 깊게 느껴왔는걸? 등등.
심지어 이런 식이라면 사람이 사실 고양이고 고양이가 사람인데 우리가 착각하고 있다는 헛소리까지도 정당화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되면서 메갈 등지에서 올라오는 “OO도 여혐이다!” 같은 발언은, 그게 진실로 무엇이든 전부 다 설득력 있게 들릴 겁니다. 사실 그렇게 되지 못 하는게 이상해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릴 수 있는 분별력은 사라지죠. 이는 그 발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여성혐오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한 경험적 실체와 정의, 이 개념에 포함되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숱한 혼동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당장 그런 글을 올린 사람의 발언 속에서 그 현상과 여성혐오 개념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인상이 들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냥 바로 그 자리에서 내 머릿속으로 둘 간의 연결점을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소설을 쓰는 것이죠. 메갈이나 일부 중고등학생들의 트위터에서 나타나는 “OO도 여혐이다!” 같은 이야기는 이미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여성혐오”라는 표현의 적절성에 감탄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사회의 모든 영역에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죠.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듯 보이죠. 그러나 대체로 담론의 영역에서, 모든 현상에 지나치게 적용이 잘되는 포괄적인 개념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 오히려 그 개념의 약점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새로운 문제점은, 구체적이고 성숙한 대화가 불가능해진다는 겁니다. 메갈리아 계통의 원색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도대체 서로 의미하는 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메갈 계열 내에서도, 또 그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미있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질 위험이 있는 것이지요. 워마드를 하는 학우에게 “우리의 목표는 남자들을 설득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그러나 그저 일을 한 단계 늦춰 줄 뿐이죠. 남자들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면, 당장 이들의 1차적 목표는 여자들끼리 서로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하고 뭉치자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딱 잘라 말해 그게 성공적이었습니까? 앞서 말했든 그 안에서 서로 싸우고 분열되어 갔죠.
 
목적이 같다면 모두가 완전히 똑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뭉치는 것과 조각조각 파편화되는 것 사이의 이분법에 따라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의견이 달라도 서로 공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위해서는 성숙한 논의와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여성혐오 개념은 일단 기본적으로 막연하게 불만과 분노를 품은 젊은 여성층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결국 그 안에서 다른 의견을 품은 채로 공존하게 하지조차 못했어요.
 
또 하나 제가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구체적 삶의 맥락이 감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삶의 맥락은 구체적인 인간들 간의 복잡한 연관관계로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하나로 일원화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다양한 갈등과 충돌을 낳습니다. 여성들이 느끼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그런데 사실 이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여성의 문제 뿐 아니라 남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들의 삶의 맥락, 이해, 가치관과 태도, 시대성에 대한 반응 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상대방인 여성들이 받아들이게 될 어려움을 극복할 실마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하지 않죠. 그게 솔직히 온라인 커뮤니티에 분노게이지를 충전하러 오는 이들에겐 골치 아픈 고민이기도 하고, 또 남자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요. 여성혐오 반대 운동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다른 영역들과의 충돌을 무시해버리고 싶은 유혹에도 넘어가게 되구요.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소비하는 메갈 등지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투적 운동가로 자처하죠. 그러나 “여성혐오”라는, 누가 되든 거부하는 게 이상할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장막 뒤에 숨어서 안위하는 이들의 태도가 솔직히 바람직한가요? 제가 보기에 무책임하며, 심지어 그들이 스스로 거부하고자 하는 여성에 대한 고정적 성 역할을 도로 수용하는 귀결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불편한 문제에 대해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 “여성혐오는 안돼!”하고 부르짖는 단순한 방식의 사회운동은 물론 그 거대한 응집력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사용하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전략이 될 수 있겠죠. (그마저도 점차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들은 진정으로 여성의 삶에서 느끼는 구체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무지해지게 됩니다. 그런 매커니즘, 문제를 인식하고, 분석하여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과제는 그대로 맨스플레인하는 ‘한남충’과 자기들의 방식에 공감 못하는 ‘흉내자지’,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 ‘꿘’들이 떠안게 되겠죠. 실제로 워마드 유저는 구체적인 해결책은 온건한 여성운동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하더군요. 장막 너머에서 이들이 구체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동안, 메갈 계열들은 바뀐 사회의 모습을 보고는 “우리가 해냈다!”하고 외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런가요?
 
여성혐오를 남용하는 사람들은, 이 표현이 갖는 위력을 통해 구체적인 관찰을 하지 않아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여성혐오 딱지를 받게 되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대안 역시 무분별한 처벌과 금지 밖에 없어지게 되구요. 제대로 된 상호이해와 설득이 애초부터 불가능해지죠. 흡사 성경의 논리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데 성공한 급진적 개신교도들이 “동성애로부터 승리했다! 동성애를 박멸시켰다!”라고 외치듯.
 
결과적으로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어떠한 현상이나 상태에 대해서도 내가 느끼기에 불편하다면 아무데나 붙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물론 실제로 사회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여러 문제들이 과거에 여성에 대한 차별적 관념에 따라 형성된 것일 수 있어요. 그런 현상은 분명 무수히 많죠.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가 그런 현상이고, 어디부터는 여성혐오와 관련 없는 현상인지,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개념분석 작업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하는 그 어떠한 시도도, 에너지만 소모할 뿐 실제로 여성들이 삶에서 느끼는 어려움, 문제, 차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여성혐오라는 표현을 남발하기보다 구체적 삶의 맥락에서 실질적으로 여성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먼저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때로는 여성문제로부터 벗어난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경험적 관찰로서 해명해 나가는 것이 되겠죠. 그래야만 그 문제에 대한 개선책과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들이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도 상황을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겠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여성운동을 하찮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성들이 실제로 느끼는 차별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문제가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앞세워서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여성혐오인가 아닌가를 두고 다툴 이유조차도 없습니다. 구체적 맥락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여성문제의 변혁을 향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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