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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갑위원회

  • 3월 당원모임 보고서
[3월 당원모임 보고서]
 
일시 : 2023년 3월 26일 오후2~5시
내용 : 제주4.3평화기행
참여 : 총7명


1. 첫 출발지 [관덕정]

*제주4.3의 시발점이된 1947년 3월1일 28주년 3.1절 기념행사가 열린장소.
[1947년 3.1 발포사건]의 장소이기도하다. 기념행사를 구경중이던 어린아이를 기마경찰이 치고 그냥 지나가자 군중들이 이에 항의했고 경찰은 경찰서로 도망쳤다.
군중들이 돌을던지며 항의하고 거리가 난장판이되자 경찰서에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줄 알고 군중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6명이 희생됐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등과 신체뒤쪽으로 총을 맞았고 이는 흩어지는 군중을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볼 수 있다.

4월 28일 미군정과 무장대의 평화협정(무장대 김달삼 총책과 제9연대장 김익렬연대장)
사흘뒤 우익청년단이 저지른 '오라리 방화사건'발생, 미군정 다시 강경진압
기록여화 '제주도 메이데이'에 기록됨
김익렬연대장 해임 박진경 대장진급뒤 후임으로 옴(한달뒤 암살)
5.10 총선거 실시, 제주도 3개선거구 중 2개 선거구 투표수 미달
6.23재선거 시도했으나 실패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 선포(법적요건 갖춰지지않음)-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됐다.
-합위지경 = 적군에게 둘러싸이거나 공격당할 떄 경계하는 계엄지구
*현재 관덕정과 그 주변엔 이와관련된 안내문이나 표지석조차 세워져있지않다, 차후에라도 이와관련된 표지석이 세워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2. 두 번쨰 장소 [빌레못굴]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벌인 대대적인 수색작에 의해 동굴이 발각되면서 이 속에 숨어 있었던 애월면 어음,납읍,장전리 주민 29명이 집단학살 당했고 굴 속에서 나오지 못해 굶어죽은 아버지와 아들, 또 다른 어머니와 딸 4구가 발견된 비극의 현장. 그 당시 겨울이여서 밥짓는 김이 올라오는걸 보고 동굴 입구를 찾은 토벌대는 숨어있던 주민 29명을 집단총살했다.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이 노약자들이였고, 당시 토벌대가 서너살 난 어린이의 다리를 잡고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이야기가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의 입을 통해 전해져온다.
*굴은 현재 출입이 불가한 상태로 관리,학술목적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문화재청의 허가가 필요하다) 굴주변은 나무 한그루가 입구를 지키고 있으며 참배객들이 리본을 달아 추모를 하고 있다. 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있으며 세계최장길이의 용암돌굴이다(굴 길이가 약11km) 세계에서 두 번쨰로 큰 용순이 굴 안에 있다고한다.

3.세번째 장소 [만벵듸 공동묘역]

1950년 음력 7월 7일 칠석날(8월 20일)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희생된분들의 공동장지.
한국전쟁 직후 한림 및 무릉지서에서 검속된 분들이다.
유족분들마다 증언은 엇갈리나 희생된 분들은 63명으로 파악되고있다.
이곳에는 48명이 영면해있고 다른분들은 개인장지에 묻혔다.
희생자들은 여러 사유로 한국전쟁직후 검속되었고 검속은 희생된 전날까지 이루어졌다. 이들의 구금장소는 당시 한림면 어업창고였다. 그리고 섯알오름의 탄약고터 작은 구덩이에서 학상됐다.
이 공동장지는 유족 분 중 한분이 무상으로 내놓아다고한다. 묘역안에는 희생자분들과 원래 그곳에 묻혔던 토지주인의 묘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예비검속법-
일제강점기때 범죄 방지 명목으로 죄를 지을 개연성이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을 규정한 법률. 미군정때 폐지되었으나 정부수립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시작되었다.

4.네번째 장소 [진아영할머니삶터]

제주4.3 당시 총탄에 맞아 한 평생을 턱 없이 살아온 고 진아영 할머니 삶터이다. 진아영 할머니는 1914년생으로 4.3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의 집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진아영 할머니는 2004년 9월 8일 별세했다.
평생을 무명천으로 얼굴을 덮고살으셔서 무명천할머니라 불렸다.
평생을 약과 링거에 의지래 살으셔야했고 턱이없어 말을하기 어려워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했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하여 병원비를 벌기위해 톳이나 백년초를 뜯어파는일과 일주일에 두 번 읍내 병원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이셨다한다.
부상 트라우마로 다른이들 앞에서는 절대로 먹고마시지 않았고 대문과 방문에는 늘 자물쇠를 걸고 다니셨다한다.
 
현재 제주주민자치연대 등 민간 차원에서 삶터 보존회를 꾸려 관리하고 있다. 2008년 3월 25일, 월렬리 무명천할머니 생전의 집을 전시관으로 탈바꿈하여 오픈하였다. 진아영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집이 헐리게 되자, 시민단체 사람들이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4.3의 상징인 진아영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복원하여 알리자는데 뜻이 모어져 진행된 일이였다. 이곳에는 할머니의 유품들이 전시되어있고 할머니 생을 다룬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어 방문객들이 자주 찾아온다.

[총 예산]

회비 2만원(총7명) = 140,000원
유류비 + 저녁식사비 = 20,000원 + 116,000원 (현금80,000원, 계좌이체 36,000원)
남은 예산 = 4,000원(지역위 예산으로 편입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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