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도영 당원(고양일산지역위원회)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는데, 이제는 볼 수도 없는데, 그래서 더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에겐 가수 김광석이 그랬다. 대통령 노무현이 그랬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그렇다.
정치의 사회화는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노회찬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은 어머니를 통한 기억이다.
세기말 99년에 태어난 나는 정치판이 요동치던 격동의 21세기 초반 유년기를 보냈다. 여당은 분당하고, 야당은 탄핵쇼를 벌이고, 사상 처음으로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입하던 그 시절.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어린 마음에 궁금했던 것은 ‘왜 항상 엄마는 3번 이상의 숫자만 찍지?’ 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
항상 민주노동당을 찍고 거대 양당에 표를 준 적이 없는 어머니. 그분은 농담으로, 하지만 또 진심으로 TV에 나오는 저 사람이 자신과 같은 노씨 성을 가졌다며 자랑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그는 김종필 전 총리를 제치고 비례대표 마지막 순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 선거에서 자민련과 김종필이 0.2%의 득표율만 더 확보했더라면 아마 지금 내 인생은 전혀 다르지 않았을까. 그 시절 TV에 얼굴을 비추던 호빵맨 같은 아저씨가 내 삶에 이리도 큰 존재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 이후로도 노회찬이라는 이름은 잊을 만할 때마다 내 뇌리에 다시금 새겨져 왔다. 나는 아직도 민주당과 통합하라는 새누리당 의원의 비아냥에, ‘한국과 일본도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친다’ 라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박근혜가 인권탄압을 당하고 있다는 양심 없는 소리에 직접 신문지를 깔고 눕던 그를 기억한다. 과연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능했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십 대 철부지에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노회찬의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가장 쉬운 서민의 언어로 만인을 위한 정치를 하던 사람. 정치란 높으신 분들이 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깨부수면서 정치의 사회화와 대중화에 애썼던 사람. 나는 그 사람 덕택에 진보정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사람이 준 마지막 선물을 받아 이 당에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했고, 대학 진학을 위해 디자인이라는 길을 택했다. 사실 내가 택한 길에 대해 어떤 신념은 없었다. 그저 대학을 졸업하고 그저 그렇게 취직하여 디자인이라는 재화를 파는 노동자로 먹고살고자 했다. 정치판을 보면서 개탄해 왔지만, 막상 내가 뛰어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랬던 내게 노회찬은 의지를 주었다. 그가 남기고 간 길을 내가 이어받아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왔다.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다, 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내년에는 정치외교학을 부전공으로 시작해 볼까 한다. 노회찬이란 사람이 내게 주고 떠난 가장 큰 선물은 그것이 아닐까. 내 삶에 신념을 부여하고 또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
나와 일면식도 없는 그 사람은 어린 나의 정치 사회화를 이끌었고, 진보정치가 무엇인지 알려 주었고, 마지막으로 나를 이 당으로 인도해 주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이 당에 들어온 이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추천인 노회찬에게서 받은 정의당이라는 선물은 이제 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에게 받았던 이 선물을 다른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게 되돌려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미술 전공이기에, 해 드릴 수 있는 것을 하려 힘겹게 그려낸 초상화를 고인의 영전에 바치면서 이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나는 왜 그가 살아 있을 때 고작 이 그림 하나도 그려 주지 못했을까.’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무겁고 슬픈 일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아는 동물이니까.
생의 마지막쯤 가서,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에서 노회찬을 만나서 ‘당신 덕분에, 당신이 가려고 했던 길을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소주 한 잔 걸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제 그를 보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