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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나니

故 백기완 선생의 노제에 수 십 개의 만장이 펼쳐졌다. 시인이자 사상가 실천가. 시대의 어른이 가셨다는 탄식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한 故 백기완 선생의 삶의 기록들은 어느새 한편의 시처럼 읽혔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 같았다. 시인이 아니라 차라리 “시” 가 된 백기완 선생은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나니” 라는 문장을 남겼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나니 (백기완)
 

영결식 이후 그가 말한 ‘늪에 빠진 혁명’과 ‘앞장선 예술’에 대해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시와 삶이 하나로 일치되는 삶은 무엇인가. 오랫동안 문학 언저리를 기웃거려온 내게 그런 추상은 민중해방, 사회주의적 혁명보다 실존적 의미의 선언으로 다가왔다.

백기완 선생은 원래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던 문학청년이었다. 1933년에 태어나 해방, 전쟁, 독재, 노동탄압. 촛불까지 경험한 그도 피투성이 존재로 이 세계로 내던져진 개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의 부조리와 끊임없이 대결하면서 온 몸으로 “시”를 써야 했던 인간으로 성급하게 초월적인 세계에 의탁하거나, 책상 앞에 앉은 서생이 되길 거부했다. 무지몽매하게 살다 가느니 차라리 거리에서 감옥에서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수의를 휘감은 채 종이를 폈고, 역사의 칼날에 베인 살점에서 떨어진 피로 시를 썼다. 

그런 故백기완 선생의 시는 어쭙잖은 나의 펜을 꺾게 했다. 입으로 혁명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단지 문장으로 불온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런 질문이 자주 밀려왔다.

19일 노제에서 장엄한 추도사가 울려 퍼졌고 거룩한 절규가 이어졌다. ‘사랑도 명예도 남김없이’를 선창한 백기완 선생의 목소리가 도심을 채웠다. 마스크로 입을 막고 한 줄로 서서 고개를 떨군 채 산자들은 묵묵히 걸었다. 만장을 들고 선 이들의  행렬 속에서 백기완이란 이름의 완성된 ‘시’를 읽었다.

그의 죽음은 유연하게 얼버무려지고 화려하게 치장된 슬픔이 아닌, 현실의 적대적 모순과 공명했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 서나니’

만장 위에 새겨진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안에 잠든 줄 알았던 엄습해오는 희망, 기투, 분노의 내용을 다시금 확인했다.  ‘시’가 아무 영향도 없는 세계에서, 오히려 ‘시’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혁명이었던 것이다.

백기완 선생의 시는 이윤에 빠져 사람을 잡아먹는 우리사회의 집단적 착란을 깨주는 자각몽이자 늪에 빠진 혁명을 건져내는 예술이었다. 예술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의 기만, 자본주의가 낳은 끔찍한 현실이 더 허구적이며, 우리가 기필코 무너뜨려야 할 이 세계의 일각임을 천명한 연과 행이 되었다.

그리하여 백기완 선생이 남긴 시는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건” 그의 발자국에 맺힌 선연한 문장이 된 것이다.

2021년 2월 23일
정의당 서울시당 공동대변인 여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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