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도자료] 김창인 청년정의당 대표, 10.29 이태원 참사 관련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보도자료] 김창인 청년정의당 대표, 10.29 이태원 참사 관련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청년정의당 토론회: 참사의 시대를 살아내는 청년세대> 김창인 청년정의당 대표 토론문

- 일시 : 2022년 11월 22일(화) 19시
- 장소 : 국회 의원회관 제8간담회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참사 직후 우리 사회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단순히 참사의 규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8년 전 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때의 그 기억을 떠올렸다. 더욱이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에 대한 혐오, 국가행정의 무책임한 태도와 꼬리 자르기 행태까지 현 정부의 대응과정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면면들은 세월호 당시와 꼭 닮아있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동일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청년세대가 참사를 반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 8년 전 시민들이 던졌던 문제의식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대통령을 끌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마주하면서 또다시 무력감에 빠져야 했다. 결국 대통령 개인 말고는 우리사회가 변한 것이 없었다는 방증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참사에 대응하는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의 모습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고 신고 시각에 대한 보도 이후, 국가 책임을 묻고 행정책임자 파면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김건희 특검’과 ‘윤석열 퇴진’을 구호로 매주 진행된 촛불집회에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라는 구호가 하나 더 추가된 것에 불과한 정치적 행위가 추모로 둔갑해있다. ‘퇴진이 추모다’라는 피켓들 사이에 간간히 보이는 ‘김건희 특검’ 피켓은, 한국정치의 파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의 사회적 경험이 과연 유효하고 의미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의 감각과 대중들의 감각이 확연히 다르다는 지점을 짚어야 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 일부는 세월호 당시 사회적 경험을 과도하게 이태원 참사에 투영하고 있다. ‘막을 수 있었다, 국가는 없었다’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국가부재에 대한 질문은 세월호 당시 담론을 그대로 가져온 셈이고, 국정조사-시민사회 연대체 구성-촛불집회-퇴진 구호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단 기간에 완성된 것 또한 세월호에 대한 학습효과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대중들의 정서가 이와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참사부터 퇴진까지 일직선으로 로드맵을 구상하고 추진해나가고 있는데, 대중들은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세월호를 통해 경험했다. 이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의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대화와 토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너무나 일찍 생략(포기)해버렸다. 세월호 당시, 박근혜 퇴진 촛불 정세와는 다른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퇴진은 추모가 아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책임여부 혹은 퇴진에 대한 동의여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애도의 정치-추모의 정치화는 퇴진 구호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책임을 묻는 것이 정권에 대한 책임 요구로 축소되거나 수렴될 수 없다. 정권교체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재난과 참사 이후, 사회는 ‘반성과 성찰’을 기반으로 변해야 한다. 불평등이 재난으로 심화되지 않아야 하고, 참사를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코로나 재난 속에 비대면-원격사회로 전환을 대안으로 내놓고, 이태원 참사 직후에는 정권교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대안들이다.

 참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에게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그 권리는 정치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추모와 애도에서 정치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추모와 애도가 정권에 대한 분노로만 귀결된다면, 안전 사회-대안 사회는 누가 만들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추모의 정치화’는 어떻게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추모의 대화’를 사회적으로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기성국가-기성정치-기성사회를 거부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산발적으로나마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퇴진이 추모’라는 구호는 이 모든 과정과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대통령 퇴진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회 전반의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퇴진운동이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참사를 마주하지 말자. 어떤 결론으로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추모하고 대화하고 연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모아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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