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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책제안/토론

  • 헌법개정 논의에 앞서 생각해야 할 '삼권분립'의 문제에 대하여

18세기 구체제의 삼권분립을 대체할

권력분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해 (1)

이규봉

 

헌법은 국가라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존재가 자신의 실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선언한 것이다. 헌법의 전문은 국가의 정신이고 헌법조문은 그 몸이며 옷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과 제2항이다. 개헌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건, 헌법이 어떻게 변경되건 이 조항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먼 훗날 전 세계의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세계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고쳐져서도 안되는 절대불변의 조항일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지고 이 불멸의 가치가 공포된 이후 70년의 세월동안 이 나라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었던 기간이 과연 있었을까? 국가권력이 진정 국민으로부터 나온 적이 있기나 하였을까?

 

876·10민주항쟁 이후 독재정권이 밀려나면서 민주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권력을 행사하는 곳곳에 낡고 부패한 세력들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 국민의 뜻은 도외시하고 그들 개인 혹은 집단의 욕망을 구현하는 도구로 권력을 이용하였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따라 과반수이상의 다수인 사람을 뜻한다. 보통의 상식을 지닌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주권이고 국가권력이다. 총칼을 허리춤에 찬 자들이 겨눈 총구,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 정객들의 큰 목소리, 엄청난 재력을 자랑하는 부자들의 돈, 높은 학력과 넓은 학식을 뽐내는 사람들의 지식을 주권이라 하지 않고, 그 사람들만을 국민이라 일컫지도 않는다. 그러니 새로운 헌법에는 평범하면서 보통의 상식을 지닌 국민이 진정한 주권자이고, 국가권력을 만드는 사람이며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임을 명백히 해야 한다.

 

그런데 지난날의 정치체제에서 헌법제1조는 왜 명목상의 선언으로 그쳤던 것일까? 민주공화국의 정치체제를 갖추었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왜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을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정부가 세워지고 7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오늘날까지도 권력의 중심은 대통령이다. 핵심권력이 대통령에 집중된 대통령중심제이고 대통령의 통괄아래 놓인 중앙집중의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독재자로 출발한 이 나라의 대통령자리는 군사쿠테타의 주역들이 이어받으며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잠시 민주세력의 집권기간 동안 대통령의 선의에 의해 권력의 패권적 행사가 자제되었을 뿐 재집권에 성공한 수구반동세력들은 통일추구를 비롯한 헌법의 지향을 무시하고, 주권자이자 국가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위계로 짓밟았다.

 

그런데 이렇게 헌법이 유린당하고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권력을 빼앗긴 채 고통당하는 동안 권력체제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입법부와 사법부는 무엇을 하였을까? 행정부를 가장 강력하게 견제하여야 할 입법부-국회는 정권의 거수기 노릇이나 하면서 자신들의 이권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쿠테타로 집권한 자들을 내쫓기는커녕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하고 허수아비 종노릇에 충실하였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불법을 막고 파사현정을 구현해야할 사법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군부독재세력의 들러리 역할을 맡아왔다. 헌법을 지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법률과 법정신을 유린하면서 국회와 마찬가지로 독재의 앞잡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삼았다. 입법부나 사법부 모두 삼권분립에서 논한 삼분된 권력의 한 축이 되어 견제와 균형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권력의지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으며 독재권력의 총칼에 맞설 방법 또한 없었다.

 

현재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의 국가권력은 당연히 대통령에게 집중되어있다. 행정부의 수반이며 다수당의 대표이기에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면서 동시에 대법관을 임명하는 권한이 있어 사법부까지 통제할 수 있다. 대통령으로의 이러한 권력집중은 우리 헌법이 여전히 독재시대의 유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회와 사법부는?

독재정권하에서의 행태대로 국회는 그들의 밥그릇을 키우는데 열중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특권 내려놓기는 언제나 특혜 늘리기로 끝났을 뿐이다. 심지어 온갖 비리와 악행을 저지르고도 면책특권으로 울타리를 치고 가벼운 구설수만 견디면 응분의 처벌은 받지도 않은 채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있다.

사법부는 거의 별천지라 할 수 있다. 잘못된 판결임이 밝혀져도 법관은 처벌받지 않는다. ‘한 번 법관은 평생 법관이다.’ 잘못을 저지른 판사가 처벌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권의 눈밖에 나지만 않으면 평생 호위호식하다 퇴임 후에는 전관예우를 받으며 목돈 챙기는 변호사가 된다.

권력실세들과 협력하는 한 국회는 제 밥그릇크기를 제가 정할 수 있고, 법원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호받는다. 이런 실정이니 그들에게 나쁜 권력에 대항하는 견제 혹은 균형을 잡는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삼권분립에 대한 의심과 회의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개헌을 논하기에 앞서 삼권분립의 실효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암묵적인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세계 대다수의 나라들이 국가권력을 구성하는 체제로 삼고 있고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으로 여겨지는 삼권분립. 이 권력분할의 명제가 과연 절대불변의 진리로 타당할까?

 

모두가 알고 있듯이 국가권력의 독점으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 고안된 삼권분립은 법의 정신이 낳은 산물이다. 몽테스키외가 갈파한 법의 정신18세기 절대군주가 지배하던 제국주의 왕조시대, 귀족과 신흥부자인 상인들의 권력확장을 대변한다. 그 사상은 제국주의의 시대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미 형성된 권력 집단세력 간의 조정을 위한 타협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권력을 행사하는 왕권과, 권력행사를 일정정도 견제하기 위한 귀족·상인집단인 의회, 그 두 세력 간의 충돌을 중재, 조정하는 법원이라는 권력삼부(삼권분립)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삼권분립은 국민이 주인인 시대에 맞지 않다. 오늘날 통용되기에는 낡아버린 구체제의 유산일 뿐이다.

 

첫째, 시대정신이 다르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설파하는 18세기는 절대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권이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고, 왕국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인 귀족 또한 여전히 계급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족과 귀족 서민들 중에서 부유한 상인들이 나타났지만 식민지시대의 이들은 또 하나의 착취, 수탈계급이었고 자유민이 된 대다수의 서민들은 예전의 농노, 식민지의 일반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하층민으로 착취와 수탈의 자유로운 대상이었다. 제국주의를 기본질서로 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왕권과 세습귀족 및 신흥부유층이 권력을 다투던 18세기의 시대정신은 착취와 불평등이었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치면서 세속적인 의미의 세습권력은 사라졌고, 구조적인 수탈과 착취, 불평등이 상존하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제국주의와 식민지수탈, 불평등 계급사회는 없어졌다. 따라서 명목상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국가권력은 어떤 특정집단에도 상속되지 않는다. 이제는 보통의 상식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 국가경영에 직접 참여하고자하는 의지가 생겼다. 권력을 물려받은 자들, 똑똑한 지식인들에게 나랏살림을 빼앗겨 혹은 위임하여 맡겨본 결과에 낙담하고 실망하여 쌓인 불만들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 주권자임을 자각하였고 지배세력에 대한 불만과 낙담, 그리고 실망으로 국가권력의 행사에 직접 참여하여 담당하겠다는 욕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국민들이 권력집행의 주체로 나서겠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이다

 

둘째, 권력의 분할에 대한 패러다임이 구체제적 발상이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국민전체의 의지를 권력으로 행사하려면 그 권력을 특정집단에 위임할 수밖에 없다. 이때 특정집단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집단에 권력을 나눠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삼권분립은 실패한 권력분할, 견제·균형이었음이 드러났다. 그 이유는 삼권분립이 구체제의 낡은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군주정을 통한 안정되고 균형 잡힌 국가체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는 민주주의와 공화정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마키아벨리 만큼이나 군주정에 충성심을 보였고 적절히 통제되는 군주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설파한 법의 정신과 그것이 구체화된 삼권분립은 자비로운 왕정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분할의 방법론이었다.

 

이제 21세기의 국가권력은 명실 공히 국민에게 있다. 상식을 지닌 평범한 국민들이 주권자이면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우리시대의 권력체계에 대한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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